[제이캐스뎀] 호두까기 인형 Ⅲ
※ 호두까기 인형에서 영감을 얻어 작성한 글입니다. 원작과 유사한 부분이 발견됐을 때, 표절이라는 오해를 사고싶지않아 미리 고지합니다. 작중 배경은 1860~70년대 생활상을 참고한 가상의 장소입니다. ※
호두까기 인형 Ⅲ
제이슨 피터 토드 X 카산드라 케인 X 데미안 웨인
3년 후.
"...제이슨."
모든 가구에 희고 빳빳한 천을 덮어둔 방은 이미 3년간이나 비워져있던 탓에 한기가 돌았다. 침대 맡에 앉아 정면에 놓인 창문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카산드라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창문 앞에 놓인 책상 -마찬가지로 흰 천을 씌어놓은- 을 보면 마을에 살 때가 자꾸만 떠올라 더 괴로웠다. 정확히는 알프레드의 작업대 앞에 앉아 그녀를 향해 웃어주는 제이슨의 모습이 떠올라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제이슨.
카산드라는 제이슨에게 부치는 물품 사이로 늘 제 편지를 끼워넣었고, 직접 시립 발레단의 사무실로 찾아가 전하곤 했다. 다녀오는 길에 알프레드에게 들려 함께 점심을 먹었고, 다녀오고나면 방에 틀어박혀 내내 잠만 잤다. 2주에 한번씩은 꼭 평생 눈을 붙여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늘어져있던 카산드라가 오늘은 제이슨의 방을 찾았다. 외출할 때의 차림 그대로 멍하니 앉아있는 제 아가씨의 모습을 문 밖에서 가만 바라보던 로지는 한숨을 쉬었다.
제이슨이 카산드라에게 인사도 없이 떠난 후로 그에 관한 어떤 소식도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검고 짧은 머리가 어느새 날개뼈를 넘어 흩날리도록, 키가 좀 더 크는 바람에 치맛단을 수선하는 동안에도, 편지를 수백통이 넘게 쓰는 동안에도......
"아가씨."
"...로지."
"저녁에 오페라 공연 보시라고, 데미안 도련님이 티켓 보내셨어요. 명단에 이미 이름도 올려두셨대요."
퍼렇게 멍 든 가슴으로 생기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도 카산드라는 자랐다. 이젠 제법 숙녀 태가 났고,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카산드라를 한번씩 돌아보곤 했다.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쓸쓸하고 음울한 별채에 3년이라는 시간이 켜켜이 내려앉는 동안, 그는 웨인 가의 정통 후계자로서 손색없는 청년이 되었다. 여러 가문에서 넌지시 데미안과 카산드라에게 각각 혼담을 넣곤 했지만, 브루스와 알프레드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직 제이슨이 데뷔 무대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경사를 만들고싶지 않은게 두 사람의 마음이었다.
덕분에 데미안은 아직 약혼자가 없는 몸으로 자유롭게 생활했다. 무도회장에서 며칠밤을 새고 들어온 후에는 카산드라에게 외출할 것을 제안했고, 종종 꽃을 선물하거나 그보다 더 값나가는 것을 건네기도 했다. 이렇게밖에 못 자랐구나. 마음에 드는 여인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한 거구나. 체념한 뒤로는 데미안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카산드라는 신경쓰지 않았다.
하얀 봉투를 바라만 볼 뿐 미동도 않던 카산드라는, 잠시 후 손등으로 로지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거절의 뜻임을 알고 에이프런 앞주머니에 봉투를 넣은 로지는 카산드라 곁에 앉았다. 카산드라가 의아한 눈길로 돌아보자 슬몃 웃는 로지의 손바닥 위에서 무언가가 빛난다.
"아가씨께 드리는 제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이건..."
"똑같은 걸 다시 주문할까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제이슨 도련님이 주시는 게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틴케이스에 넣어두는 것보다는 이게 낫죠?"
실은 이브 날 밤까지 기다리려했는데, 아가씨가 요즘 많이 힘들어하셔서 지금 드려요. 로지의 굳은살로 뒤덮인 손바닥 위에서 검지손가락 세마디만한 유리병을 집어든 카산드라는 희미하게 부서지는 겨울 햇빛에 병을 비추어보았다. 코르크마개가 끼워진 유리병 바닥에는 제이슨이 밟아 부순 라피스라줄리 파편이 빛나고 있었고, 그 사이로 로켓에 끼워져있던 두 사람의 사진이 고정되어있었다. 예쁘다. 예쁘다. 입을 조그맣게 벌리고 폭이 좁은 병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카산드라는 로지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너무 예쁜 선물이다..."
"이제 기운 좀 내세요, 아가씨."
"...예전에,"
"..."
"알프레드가 내게 그런 적이 있어요. 제이슨은...언제고 마을과 나를 떠날 수 있고, 그럴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니까...마음을 너무 많이 내어주지 말라고..."
"..."
"...난 그 때 이미...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제이슨에게 주었는데."
유리병을 깨지지 않게 소중히 쥐는 카산드라의 손가락 틈으로 푸른 돌이 반짝인다. 눈물에 색이 있다면 푸른 색이고, 슬픔에 색이 있다면 분명 푸를거야.
"제이슨은 언제나 곁에 있어주었는데, 그가 날 떠나게 만든 건 내 자신이에요."
차라리 우시면 좋으련만. 세상이 떠나갈 듯 소리 지르고, 미친 것마냥 죄다 던져버리고...그렇게 목놓아 우시면 좋으련만.
"...그를 떠나게 만든건 발레도 데미안도 아닌 나야."
더 이상 로지에게 하는 말이 아닌 듯,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 넋 놓고 중얼거리는 카산드라의 손을 놓은 로지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당겨안았다. 사근사근, 어깨를 토닥여주는 손길에 눈을 감은 카산드라는 갑자기 피곤을 느꼈다. 제이슨의 손길이 닿았던 기억이 되살아나 눈가가 뜨거워진다. 추억 속 두 사람은 노란 프리지아 꽃밭 새에 드러누워있다가 서로를 간질이며 깔깔거리기도 했고, 카산드라가 만든 타버린 빵을 억지로 먹으려는 제이슨 탓에 실랑이를 벌이다 지쳐 늘어지기도 했다. 달빛으로 푸른 밤이 찾아오면 흔들의자에 함께 앉아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카산드라는 로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게 다 기억나는데, 그가 어떻게 턴을 도는지, 어떻게 뛰어오르는지, 그의 체향은 어떤지, 발의 모양은 어떤지, 무슨 꽃을 좋아하고, 무슨 책을 좋아하는지, 식성은 어떻고 키는 어느 정도인지, 모든 것이 또렷한데 단 하나. 목소리가 없었다. 제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가 없고, 사랑한다 속삭이던 목소리가 없다.
[ 넌 그가 사준 옷을 입고, 그와 함께 있었어. 그리고 그를 밀어내지 않았고. ]
그녀에겐,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하얘진 그의 얼굴과 붉어진 눈, 퍼렇게 질린 입술만이 남았다. 영영 듣지 못할지도 모를 그의 목소리 대신 거칠게 휘갈겨진 미운 글씨만 남았다.
***
- 제이슨!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었다. 눈 앞에서 웃고있던 카산드라가 빙글빙글 돌다 넘어져 달려가면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뒤를 돌면 끝도 없이 이어진 온실 안에서 데미안과 카산드라가 뒹굴고 있었고, 눈을 감았다 뜨면 카산드라가 제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 눈부신 타일과 요란한 장식의 욕실 안에서 씻고 있던가 하면 바트의 술집에서 눈을 뜨기도 했다. 카산드라의 비명 소리가 들린건 그 때였다. 춤을 추고 있던 제 머리 위로 수백개의 초로 타오르고 있던 금빛 샹들리에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때.
"제이슨! 제이슨! 괜찮니? 제이슨!"
"허억...허억......알프레드...?"
"그래. 나다. 괜찮은거냐?"
"네...괜찮아요. 놀라게 해드려 죄송해요..."
"아니, 아니야. 난 괜찮다."
로얄석에 앉아있던 카산드라가 벌떡 일어나며 저를 소리쳐 부르던게 아직도 눈 앞에 선했다. 꿈속에서도 그의 진동장치가 요란하게 반응했다. 아마 알프레드가 신음하는 그를 흔들어 깨우며 부른 탓이겠지만, 제이슨은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카산드라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샹들리에. 그는 단 한번도 환히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춤 춰 본 적 없고, 유리에 찔린 적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생생한 아픔이......
제이슨은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카산드라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꿈 속에서의 그녀의 얼굴. 조명 탓이었나. 그려보라면 솜털 하나까지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뇌리에 단단히 박혀있던 카산드라의 얼굴이 깨어나고보니 흐릿하다. 희미하다. 누군가가 생김새를 설명해보라면 한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제이슨의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린 알프레드는 물컵을 쥐여주고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간이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제이슨의 귀에 달린 금속 진동장치를 바라보던 그는 손을 뻗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차분하게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계속 악몽을 꾸니?"
"근래 들어선 오늘이 처음이에요."
"혹시 귀 때문이거나...박사가 무리하게 치료를 강행한다던가, 연습이 힘든거라면, 제이슨,"
"알프레드. 짧게요. 그리고 천천히요."
"아, 미안하다."
"아직은 무리예요. 그렇게 긴 말을 알아듣는건."
알프레드는 혹여 그가 악몽을 꾸는 이유가 치료나 연습이 고된 탓일까봐 염려되었다. 그는 제이슨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이슨이 무대에 오르기를 얼마나 갈망하는지는 알지만, 그의 몸이 상한다면 카산드라가 더 힘들어할 것을 가장 잘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제이슨은 제 귀에 걸린 금속장치를 검지손가락 끝으로 톡톡, 가리키며 짖궂게 웃어보였다. 들창으로 어렴풋이 들어오는 달빛에 슬쩍 비치는 알프레드의 표정이 너무나 안 좋아보였기에, 아직 꿈의 여운으로 손이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애썼다.
제이슨의 주치의가 발명한 금속 진동장치는 그의 귓가에서 모든 소리에 반응하도록 되어있었다. 각각의 소리가 가지고 있는 패턴을 진동수와 강도로 전환하는 방식이라 제이슨 본인이 꾸준히 공부하고 외우지 않으면 전혀 쓸모없는 장치가 될뻔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영리했다. 본인의 발성에도 반응하기 때문에 제이슨은 본인의 목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상대에게 말을 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귀에 걸린 작은 금속덩어리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진동패턴을 공부했고, 또 발레 연습도 소홀히하지 않았다. 얼른 낫고싶은 마음도 오늘의 상태가 될 수 있는 데에 한몫했지만, 연습할 때를 제외하곤 시간이 남아돌았던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접 면회가 아닌 이상 외부인과의 교류는 금지되었고, 외출 시에도 같은 단원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나갈 수 없었다. 때문에 필요한 물품이 아니고는 편지도 주고받을 수 없는게 시립 발레단의 규칙이었다. 물론 고된 연습을 마치고 데뷔 무대를 가진 후로는 원한다면 합숙 생활을 끝낼 수 있고, 제이슨은 그날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카산드라......머릿 속으로 이름 하나가 울린다. 그녀를 만나야해. 카산드라의 얼굴을 떠올리려하니 머리가 아파오면서 꿈 속 장면이 다시금 그를 괴롭힌다. 머리와 어깨 위로 수천개의 유리조각이 떨어지고, 눈이 아플 정도로 부신 조명을 등진 채로 비명을 지르는 카산드라의 모습......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털어놓으렴."
"걱정하시는게 뭔진 알지만, 전 요즘 행복해요. 돌아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엔 제가 쓴 각본으로 무대에 오를 수도 있고, 이젠 사람들과 대화도 가능하니까요."
"...나는 네가 아주 자랑스럽다."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알프레드는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물컵을 나이트 테이블에 내려놓고, 성냥을 찾은 제이슨은 반쯤 녹아내린 초의 그을은 심지 위로 불을 붙였다. 화악- 불이 붙어 주변이 환해진다. 불투명한 유리등을 씌운 램프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나무 액자 하나가 알프레드의 눈에 띈다. 제이슨과 카산드라가 프리지아 꽃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그가 직접 찍어준 사진이었다.
"너무 어두워서...이제 좀 낫네요."
"...제이슨."
"말씀하세요."
"캐스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그 애에게 너무 오래 등 돌리고 있지 말아다오."
"..."
"네가 이 곳으로 떠나오고, 네게 물건을 부치는 일은 늘 캐스가 직접 해왔단다. 편지도 꽤 많이 썼고...반송된 편지는 모두 내가 보관하고 있단다."
사진에 닿아있던 알프레드의 시선이 불안하게 흩어진다. 제이슨은 잠시 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애썼다. 반송될 줄을 알면서도 편지를 썼다는 뜻인지, 아니면 모른 채로 미련하게 계속 보낸다는 것인지. 알프레드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제이슨은 핏줄이 도드라진 손을 주먹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말씀 안하셨어요?"
"..."
"제가 편지를 받아볼 수 없단 사실을 왜 카산드라에게 말씀 안하셨냐구요!!"
"제이슨, 진정하거라."
"...제가 이제 들을 수도 있고, 말을 할 수도 있단 사실조차 모르겠네요, 카산드라는."
"...그래. 아직 모르고 있어."
"왜요? 대체 왜...? 제가 이 곳으로 오기 전에 카산드라에게 못되게 굴어서 그런거라면...그 일이 카산드라를 상처줘도 될만한 이유는 아니잖아요, 알프레드."
"제이슨."
"네, 제발 뭐라고 말씀해보세요. 왜 그러셨는지, 브루스도, 알프레드도 대체 왜 그러셨는지 말씀해보시라구요!!"
"캐스와 데미안을 약혼시킬 생각이란다."
약혼? 어릴 적 마을의 덩치 큰 녀석 한둘은 꼭 제이슨의 뒷통수를 후려치곤 했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정신없이 웃어댔지만, 제이슨의 귀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꼭 그 때의 기분이었다. 얼얼할 정도로 세게 맞았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그저 저들만의 세계에서 저들끼리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그런 기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는 단장의 추천으로 주연을 맡아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몇몇 단원들은 그의 장애와 출신을 놓고 음해하고 시기했지만, 악착같이 버텨 얻어낸 주연 자리였다. 카산드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매 순간 모든 것을 함께한 분신같은 그녀에게 해냈다고 똑똑히 보여주고싶었다. 그리고선 꼭 안아줄 생각이었다. 어리석게 굴어 미안하다고,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말해줄 생각이었다. 어린 형제에 대한 자격지심과 질투로 눈까지 멀어버려,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은 저를 마음껏 원망하라고 말하려했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하자고, 그녀에게 마음을 전할 작정이었다.
약혼. 3년간 발이 뒤틀리고 발톱이 모두 닳도록 노력한 이유가 한순간에 녹아 없어진다. 방금 전까지 소리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영혼이 어딘가로 빠져나간 듯 껍데기만 남아 축 늘어진 그를 바라보는 알프레드의 눈빛이 안타까움에 깊이를 모르고 어두워진다.
"너도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데미안이 캐스를 많이 아낀단다."
시선. 첫 날,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던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끈질긴 그 시선.
"브루스도...두 사람이 서로의 짝으로 모자람이 없다고 보고.."
선물. 그녀가 저택에 들어가고 며칠 지나지 않아 곧바로 그에게서 받은 드레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손길. 거칠고 서툰 키스였지만, 그녀를 붙든 손길만은 한없이 다정했던 하얗고 가느다랗던 손.
"너와 캐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를 더 소중히 여기고 아껴서 이런 결정을 내린게 아니다, 제이슨. 두 사람 다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어. 그러기 위해선 너희 두 사람 모두 웨인이 되는게 맞다는 내 판단이야. 나는 나이가 많고, 너는 이제 많이 바빠질 거야. 캐스의 곁에서 언제고 그녀를 보듬고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 필요해, 우린."
제이슨은 몸을 일으켜 맨발로 마룻바닥을 밟았다. 언제고 그녀를 보듬고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사람? 그가 짧지 않은 시간 품어온 춤을 추고싶다는 꿈이 카산드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제이슨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묻지도 않았고, 들을 생각도 없었다.
알프레드가 웨인의 성씨를 갖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단 한가지만 생각했다. 기회. 자신을 멸시한 사람들에게 너희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춤을 마음껏 출 수 있는 기회.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기회.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계속해서 춤을 추고있는 늙은 여자가 찾아올지도 모를 기회.
- 네가 원하면, 가자.
제이슨은 단 한번도 카산드라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다. 자다 말고 그녀를 안았고, 어떤 때는 손 한번 잡아주지 않았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고, 카산드라는 제 몫의 디저트까지 모두 제이슨에게 남겨주었다. 다퉜을 때도 그녀는 항상 먼저 다가와주었다. 3년 전 그 날까지도.
"...카산드라도 원하는 일인가요?"
방을 나서기 전, 멈춰 선 제이슨은 바닥으로 고개를 처박은 채로 물었다. 그리고는 알프레드의 답을 듣기도 전에 귀에 걸린 진동장치를 빼버렸다. 원하지않는 일이라면? 그렇다해서 네가 할 수 있는게 뭔데? 몸을 일으킨 알프레드는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고, 제이슨은 어두운 복도로 숨어들었다.
"미안하구나...캐스."
외투와 모자를 챙긴 알프레드는 일렁이는 램프 빛에 그늘이 진 사진 속 카산드라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
땀에 젖은 머리칼이 나무바닥에 흩어진다. 바닥을 제외한 천장과 4면이 거울로 된 연습실 한가운데에 드러누운 제이슨은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다 제 숨소리에 거칠게 반응하는 진동장치를 빼버렸다. 약혼. 그 자식과...카산드라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제이슨의 오해는 모두 풀렸다. 짙은 찻물 속으로 흔적도 없이 녹아드는 설탕처럼. 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돌아보면 카산드라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오해가 쌓였던 자리에 그는 다시 카산드라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쌓았다. 제 품에 안겨 사랑스럽게 기대오던 카산드라의 체온을 언제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그는 카산드라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우드 바(wood bar)가 고정되어있는 거울을 노려보던 제이슨은 눈을 감았다. 3년 가까이, 매일같이 이 방의 거울 앞에 설 때마다 그는 달라진 제 모습을 살피며 카산드라를 떠올렸다. 그녀도 저처럼 많이 자랐을지, 아님 여전할지를 그려보았다. 짙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빙글, 돌아보이던 모습이 눈꺼풀 안쪽에 새겨놓은 것마냥 매순간 아른거렸다. 서늘한 손. 그 손을 다시 잡을 수만 있다면......
[ ......내게 남은 건 막대한 부와 웨인이라는 성 뿐이야. 사실 지금도 그것뿐이지만...넌 나와 많이 닮았어. 내가 네게 느끼는 감정이 연민이어서 네 자존심이 상했다면 바꿔보거라. 가문과 재산을 등에 업고 너를 동정하는 이 못난 어른에게 가르쳐주렴. 당신이 틀렸다고, 나는 당신처럼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고 말이야. 웨인이 되어 도약해볼 생각이 있다면, 곧 다시 볼 수 있겠구나. ]
브루스, 당신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보이기 위해서 당신 말대로 악착같이 매일을 버텨왔어요. 어느 누구도 날 동정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웨인을 택했고, 기회라 여겨 놓치지 않으려 했어.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네요. 내가 놓치지 말았어야 할 기회는 카산드라 곁에 남아야하는거였어요.
- 데미안이 내게 선물을 줬어. 예쁜 옷이야. 꽃이 잔뜩 올라가있는 모자도 있어.
- 내가 도와줄게.
- 제이슨, 이것도 먹어.
- 멋지다, 제이.
만약 착각이었다면?
- 카산드라도 원하는 일인가요?
카산드라와 함께 했던 그 어느 순간에도 제이슨은 그녀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이나, 영원히 함께하자는 말 혹은 그 비슷한 어떠한 말도 들은 적 없었다. 당연하게 여겼다. 특별히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미래에 서로가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 모든게 내 착각이라면...? 카산드라는 날 그저...친구로만 여긴다면?
알프레드의 말 한마디가 제이슨의 모든 믿음을 흔들어놓았다. 말이 안될 건 없었다. 카산드라는 늘 제이슨의 요구와 이기적인 행동들을 감싸주고, 견뎌주었지만 먼저 그를 원한 적은 없었다. 늘 그에게 져주었지만 친구 사이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배려였다.
[ 넌 그가 사준 옷을 입고, 그와 함께 있었어. 그리고 그를 밀어내지 않았고. ]
제이슨은 감았던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몇가지는 분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머리색이 어떤지, 그녀의 몸에선 어떤 향기가 나는지. 먹지 못하는 음식이 없는 것도, 프리지아를 좋아했던 것도. 자수를 예쁘게 놓을 줄 알고, 손이 야무져 무엇이든 금방 배웠던 것도.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얼굴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웃을 때 눈이 어떻게 휘어지는지, 입술이 얇았던가 작았던가, 화가 나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품에 안겨있을 땐 어떤 얼굴이었는지도.
- 너를 따를거야.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녀를 밀어낸건 자신이었다.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 옷을 찢고, 다가오지 못하도록 밀쳐내고, 달아나고, 무시하고, 도망다닌건 저 자신이었다. 카산드라가 더 이상 자신의 곁에 남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건 고스란히 제이슨 본인의 탓이었다.
- 내가 도와줄게.
그녀가 내민 손을 뿌리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제이슨 저 자신이었다.
***
"제이슨이 많이 상처받았을겁니다."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브루스는 잔을 내려놓고, 다 식어버린 닭고기 튀김을 물렸다. 알프레드 역시 손도 안 댄 살구타르트를 옆으로 치웠다. 데미안은 외출 중이었고, 카산드라는 입맛이 없다며 별채에서 간단히 식사하겠단 전갈을 남겼다. 브루스는 제이슨과 카산드라가 저택에 온 첫 날, 모두가 둘러앉았던 모습을 회상했다. 가족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데미안이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새로운 형제를 받아들여줄 것이라 여겼고, 제이슨과 카산드라 역시 자연스레 저택의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 믿었다.
세 사람을 데려오며 그린 그림은 그리 거창한게 아니었다. 세 아이들이 나누는 얘기에 공감하지 못해 알프레드와 헛헛하게 웃는 식사 시간, 크리스마스 트리 주변에 모여앉아 서로의 선물을 풀어보며 넓은 저택에 메아리칠만큼 큰소리로 웃는 오후 시간, 정원에 쌓인 눈을 뭉쳐 서로에게 던지고 노는 두 형제를 바라보며 할아버지와 손녀같은 부녀와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그는 가족을 원했고,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건 잃긴 쉬워도 얻긴 어려운 법이지. 몰랐던 사실도 아니었는데.
"캐스가 제이슨과 혼인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잖습니까."
"...세 사람의 관계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걸 간과한 벌을 받는 중이군요, 우린."
"특별한 친구 사이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케인 양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이해 못하는건 아니지만, 제이슨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때까지 기다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이슨을 많이 아끼시는군요."
"그럴만한 아이니까요."
환한 다이닝 룸에서 새어나오는 이야기에 막 홀에 들어선 데미안은 걸음을 멈추었다. 또, 제이슨. 아직도, 제이슨. 여전히...제이슨. 3년간이나 곁에 없었음에도 모두가 그를 잊지 않았다. 데미안은 그의 이름을 들으면 숨이 막혔다. 가진건 쥐뿔도 없으면서, 많은 걸 가지고 있고 원하는건 전부 가질 수 있는 자신보다 행복한 자식.
- 데미안. 앞으로 네 형제가 될 제이슨 웨인,
- 입양 절차가 끝나면 정식으로 제이슨 웨인이라 불러주셔야 합니다, 데미안.
- 아무것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도련님을 동생으로 두게 된 제이슨도 수치스러울 거예요.
모두가 네 편만 들지. 모두가 널 기억하지. 곁에 있는 나보다, 곁에 없는 널 더. 실소를 흘린 데미안은 뒤돌자마자 멈춰 섰다. 그의 앞으로 카산드라가 서 있었다. 커튼이 내려지고, 몇 개의 초만 형형히 타오르고 있는 어두운 홀에서도 그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어느새 카산드라보다 훌쩍 커버린 데미안은 발소리를 죽여 그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똑바로 앞을 바라본 채로 미동도 않는 카산드라를 내려다보는 데미안의 눈빛이 검다.
"오페라, 왜 안 봤어?"
"..."
"토드 놈이 보여주는게 아니라서?"
카산드라의 눈길이 순간 데미안을 향한다. 그래, 그 자식 이름이 나와야 반응하지. 그 이름을 뱉어야만 날 바라봐주지, 너는.
"브루스가 많이 걱정하고있어요. 술 그만 마셔요."
"왜 내 걱정은 없어?"
"..."
"세상 고민, 걱정 전부 끌어안고 사는 네가,"
"..."
"왜 내 걱정은 단 한순간도 안하지...?"
카산드라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던 데미안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지나쳤다. 희미하게 남은 알코올향이 발목을 잡고있는 것처럼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선 자리에 붙박인듯 머물던 카산드라는 알콜향이 다 사라진 후에야 움직였다. 다이닝 룸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다시 별채로.
***
"난 제이슨을 잊을 수 없어."
"..."
"그가 날 미워하고, 평생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후벼파는구만."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런 의미야."
데미안의 방 앞에서 그를 붙잡은 카산드라는 제이슨의 방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들고있던 모자를 문고리에 건 데미안은 문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제이슨의 이야기였지만, 카산드라가 먼저 말을 걸어준건 근래 들어 처음이었으므로, 마음이 아프지만 들어줄 생각으로.
"알프레드와 브루스가 우리 둘의 약혼을 논의하는걸 봤어."
"알고있어."
"...제이슨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고."
"...알아."
"내겐 기댈 곳이 필요해."
"...!"
"네게 줄 마음은 없어. 네 품에 안겨 그를 떠올릴거고, 네 손을 잡고 그와 함께 걸을거야. 널 향해 웃어주지만 내 앞엔 제이슨이 서 있겠지. 평생을 죽은 몸만 끌어안고 살 수 있을까? 네가?"
데미안은 미간을 좁혔다. 고백 한번 기분 나쁘게 하네. 카산드라의 머리를 감싸안아 끌어당긴 데미안은 제 품에서 조용히 우는 상처입은 어린 새의 등을 한참이나 토닥여주었다. 넌 모르겠지만, 난 언제나 죽은 몸만을 품에 안으며 살아왔어. 데미안이 원한 것들은 모두 하찮게 죽어갔다. 농장에서 키우던 사냥개 한마리도, 온실에서 키우던 새도, 언제까지고 곁에 있어줄거라 여겼던 그의 어머니도.
"상관없어.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정말로 죽은건 아니니까.
***
3주 후.
- 캐스. 들어가도 되겠니?
훈김이 피어오르는 연한 녹빛 찻물 위로 설탕에 절인 레몬 두 조각을 넣은 카산드라는 알프레드 앞으로 찻잔을 놓아주고, 제 것에는 허브잎을 띄웠다. 로지의 작품인듯 넓은 방 구석구석에서 크리스마스의 흔적이 묻어나온다. 작은 초 여러개가 동그란 유리볼 안에서 반짝이고, 책상 위, 창가, 테이블 위, 침대 맡, 손이 닿는 곳마다 크리스마스 로즈가 놓여있었다.
수년 동안 중단되었던 크리스마스 이브 연회를 웨인 가에서 다시 주최하자 사람들은 초대장을 받기 위해 난리였다. 로디는 연회를 도울 하인 몇을 새로 들였고, 연일 이어지는 폭설을 뚫고 펀치와 샴페인, 온갖 디저트들이 속속 저택에 도착하는 중이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와 함께 오늘 연회에서 데미안과 카산드라의 약혼 소식을 알릴 생각이었고, 연회 중간에 오페라 홀로 자리를 옮겨 제이슨의 무대를 감상하려했다.
"이 곳 생활이 불편하진않니?"
"...할아버진 너무 늦어요, 항상."
"그랬나."
희미하게 웃는 카산드라의 얼굴이 많이 야위어있다. 곧 결혼할 신부의 행복한 얼굴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않을만큼 슬퍼보이기도 했다. 차를 한모금 삼킨 알프레드는 모든게 본인의 욕심 탓인 것만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고싶다는 단순한 욕심이 아니었다. 제이슨과 카산드라 두 사람이 다시는 그 누구에게서도 버림받거나 멸시받지않게 해주고싶은 마음이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 로지. 느이 아가씨 왜 저러신다니?
- 맞아, 제이슨 도련님 떠난 후로 늘 이상하긴 했는데...오늘은 특히 더 이상해.
- 아까 찻잔도 깨먹으셨어. 가장 아끼시던건데.
- 연회가 몇시간 남지도않았는데, 드레스 갈아입으실 생각도 않는다.
- 피곤하셔서 그래. 다른 데선 입방아 찧지마, 다들. 내 귀에 들리면 가만 안둬.
연회장에 다녀오는 길에 후원에서 물건을 실은 마차를 기다리며 종알거리는 하녀들의 이야기를 들은 알프레드는 본채로 가지않고 별채로 들어왔다. 제이슨과 카산드라의 마음이 어떻든 미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여겨졌고, 수천번 고려해봤지만 생각은 바뀌지않았다.
- 저도 웨인 가의 사람이 되고싶어요.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데미안과 함께 자신을 찾았던 몇 주 전보다도 더 안되어보이는 얼굴로 멍하게 앉아있는 카산드라를 바라보던 알프레드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제이슨은 총 네 장의 R석 티켓을 보냈고, 알프레드는 그녀가 선택하게 할 생각이었다. 알프레드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봉투를 집어든 카산드라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굳어버렸다.
머릿 속에서 수만가지의 생각이 한데 뒤엉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식 한 통 없던 제이슨이 보내온 티켓이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곧 제이슨이 어떻게 무대에 오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연주자와 합을 맞추는 모습을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한마리의 아름다운 새처럼 무대 위를 날아다닐 제이슨을 떠올리니 마음 한켠으로는 행복하기도 했다. 작은 마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약혼. 분홍빛 새틴 장갑으로 감싸인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카산드라는 봉투를 무릎 위로 내려놓고, 알프레드를 쳐다보았다. 주름이 진 이마를 검지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그의 얼굴에서 고심과 머뭇거림을 읽은 카산드라는 차오르는 불안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데미안과 저의 약혼에 대해,"
"..."
"제이슨이 아는게 있나요...?"
희미하게 피어오르던 훈김이 어느새 멎은 찻물을 응시하던 알프레드는 눈을 감고 나직한 한숨을 뱉었다. 새카맣게 타들어버린 참나무 장작이 푸스스, 부서지는 소리가 그의 한숨소리에 섞여든다. 카산드라의 검은 눈동자 아래로 투명한 눈물이 차오른다.
"알고있군요."
"...네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편지를 보내려했는지도 알고있단다."
"그런데 어째서 단 한통의 답장도 없었죠?"
"제이슨이 지내는 곳은 편지를 받아보거나 부치는 일이 금지되어있단다."
"...그럼 제 편지들은...할아버지, 설마..."
고인 눈물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여윈 뺨을 타고 흘러 흰 봉투를 투둑, 적신다. 모든 것에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세계엔 오직 제이슨과 알프레드 뿐이었고, 두 사람 모두를 잃었다고 생각되는 지금, 카산드라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고개를 떨궜다.
알프레드는 카산드라의 어깨 위로 뻗던 손을 도로 거두었다. 그녀는 여전히 딸과 다름없었고, 제이슨 역시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제이슨과 카산드라 중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다면, 같은 질문은 알프레드에겐 대답할 가치도 없을만큼 그는 두 아이 다 아끼고 사랑했다. 당장 두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이 후에는 두 사람을 살릴 길이라는 믿음을 스스로 깨버릴 생각은 없었다.
"제이슨이 합숙소로 떠나기 전에, 너희 둘 사이에 문제가 생겼었다는건 알고있었단다."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이슨과 네 관계가 깊었다면, 그럴수록 더 잘 정리해야한다고 본다, 캐스."
"알고 계시잖아요, 알프레드. 제가 제이슨에게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고 계시잖아요. 누구와 살아도 그를 잊지 못할거예요."
"캐스,"
"할아버지는 제가 데미안과 결혼하길 원하시죠. 그래서 제게 말씀해주지 않으신거예요. 그가 무대에 오를 수 있을만큼의 실력을 가졌고, 그 실력을 뒷받침해줄 수 있을만큼 치료도 호전적이라는걸."
다시 흩날리기 시작하는 눈발을 노려보며 눈물을 참으려는 캐스의 옆얼굴로 제이슨의 얼굴이 겹쳐보인다. '제가 편지를 받아볼 수 없단 사실을 왜 카산드라에게 말씀 안하셨냐구요!!' ...알프레드는 안경을 고쳐쓰고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퍼석한 모래알을 마시듯 입이 쓰다.
"...제이슨은 평생 그를 후원해줄 사람이 필요하단다, 캐스. 넌 그에게 도움을 줘야하는 간병인이 아니야. 너 역시 평생 네 곁에서 너를 지켜주고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하고, 애석하게도 나와 제이슨은 그럴 수가 없어."
"도움같은거 없이도 전 살아갈 수 있어요."
"제이슨은? 그의 꿈은? 그의 치료는? 그에겐 도움이 필요하다, 얘야."
"..."
"너도 알고있잖니. 브루스는 제이슨을 친자식처럼 생각하고있어. 그가 없을 때에도 데미안이 제이슨의 후원을 끊지않으려면 네가 곁에서 데미안을 설득해야해. 제이슨을 파양시키지 못하도록 네가 데미안 곁에 남아야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제가 마음과 몸을 팔아 제이슨의 후원을 이어나가는게, 그의 곁에서 그를 직접 돌보는 것보다 바람직하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그 누구도 완벽히 행복할 순 없다, 캐스. 누구나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있진않아. 데미안도, 너도, 제이슨도 아마 눈 감는 날까지 엇갈려 괴롭겠지. 지금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어."
"..."
"넌 똑똑한 아이잖니, 캐스. 예전으로 돌아가게되면 제이슨은 더 불행해질거다."
이곳으로 오고나서 단 한시도 잊지않으려고 노력한게 있어요. 제이슨이 행복해하던 눈빛. 사탕 바구니를 끌어안은 꼬마처럼 행복하게 웃던 그 얼굴. 내가 저택으로 온 이유구나. 그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 나는 이 낯설고 무섭고 슬픈 곳으로 온거구나. ......딱 한번만 이기적일걸 그랬네요. 그에게 세상의 소리를 들려줄 수 없고, 내가 줄 수 있는 무대라곤 삐걱거리는 다락방이 전부였어도, 나는 그 때가 정말 좋았는데. 샛노란 프리지아 꽃밭에 드러누워 서로의 숨결을 느끼던 때가 가장 행복했는데......
"캐스.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생각해보거라. 원한다면 오늘 약혼 발표를 늦출 수 있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
"할아버지 말씀대로 전 똑똑한 아이니까요. 저 자신은 아니어도 제이슨을 위하는 길이 뭔지는 잘 알고있으니까요."
"..."
"...걱정마세요. 다 이해해요."
희미하게 남은 눈물자욱마저 손가락으로 지워버리며 몸을 일으킨 카산드라는 방을 나가버렸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피로해진 눈을 문지르던 알프레드는 창턱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발견하고는 끙, 앓는 소리를 뱉었다. 푸른 돌조각이 바다처럼 반짝이는 위로 제이슨과 카산드라가 웃고있다. 더없이 행복하단 것처럼.
***
"...후회 안하시겠어요?"
후원 한쪽에서 검은 연기를 뿌리고 있는 화덕 앞에 멈춰선 로지는 들고있던 상자를 발치에 내려놓고 카산드라를 돌아보았다. 연회를 위해 푸른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져 쌓인 눈송이가 묘하게 어울린다. 샹들리에가 꼭 이렇던데. 로지의 물음에 엉뚱한 대답을 한 카산드라는 슬며시 웃으며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들었다.
"그 수많은 초에 모두 불을 붙이면, 그 빛이 살짝씩 일렁일 때마다 벽에 무늬가 생기잖아요."
"..."
"만질 수 없는 동그란 빛방울들...이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잖아요."
"아가씨..."
"난 그 화려한 전구 아래에서 춤추는 제이슨을 보고싶었어요. 내리는 눈 아래에서 몇번이고 돌고 도는 그가 너무 아름다워서......"
"..."
"...괜찮아요.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들을 욕심내는건 어리석은 일이니까."
파란 벨벳 장갑 위로 끝도 없이 뛰어드는 눈송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카산드라는 손가락을 접으며 손을 내리고는 돌아섰다. 별채로 향하는 걸음이 느리고 무겁다. 시가를 태우려다 카산드라를 발견한 데미안은 담배갑을 열어 시가를 도로 집어넣고, 걸치고 있던 코트를 끌어내려 카산드라에게 달려갔다.
솜을 덧댄 모직 코트가 데미안의 체온으로 이미 훈훈하다. 머리 위로 둘러지는 코트자락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든 카산드라는 약혼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걸음을 떼었다.
"...추워요. 어서 들어가요."
"..."
우두커니 선 자신을 돌아보지도않고 웅얼거리는 카산드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눈빛이 쓸쓸해진다. 제이슨이 달려와 옷을 둘러주었어도 계속해서 걷기만 했을까? 어째서 내가 가졌음에도 내 것이 아니지? 스륵, 눈밭 위로 스러진 코트의 온기가 금세 차겁게 굳는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들었을 번쩍이는 가죽구두 위로 축축한 눈이 한참 쌓이도록, 데미안은 움직이지않았다.
***
"도련님. 혹 캐스 아가씨를 보셨는지...?"
"케인 양이라면 아까 후원에서...방에 안계신가?"
연회장 입구에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며, 몸을 녹일 요량으로 럼주를 몇모금 들이키던 데미안은 다급히 들어서는 로지의 모습에 긴장했다. 추위에 붉게 터진 두 손이 그을음 투성이다.
"뭘 하고 있었기에 케인 양의 행방을 모르는건가?"
"...아가씨께서 태워달라 부탁하신 것이 있어 내내 후원에 있었습니다. 손님들께서 오시기 전에 허기를 재울 디저트를 가지고 방으로 올라갔는데 안계십니다."
"별채와 본채 모두 확인했나?"
"네. 아가씨를 본 자도 없습니다."
"마부들에게 확인해볼테니, 넌...제이슨의 방으로 가봐."
"네."
지나가던 웨이터를 붙들어 술이 반쯤 남은 잔을 급하게 안겨준 데미안은 곧장 온실로 달려갔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운 그대로 달려있었다. 온실 문은 데미안이 오늘 아침 직접 잠궜다. 온실은 데미안의 모친이 만든 것이었고, 데미안은 제 허락 없이는 그 누구의 온실 출입도 허용하지않았다.
코트는 몇십분 전, 후원에 버리고 온 터라 그의 짙은 남청색 자켓 위로 진눈깨비가 곧바로 내려 스며든다. 추위가 느껴지지도 않는지, 바지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은 데미안은 차갑게 얼어붙은 자물쇠를 맨손으로 쥐고는 거칠에 잡아당겼다.
온실 안은 비어있었다. 하긴, 이리로 올 리가 없지. 곧장 몸을 돌려 본채 오른편에 위치한 마부들의 숙소로 달려간 데미안은 늘어져 자고있던 어린 소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케인 양이 어디로 갔는지 당장 말해."
"도, 도련님...!"
"케인 양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외출했다.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놈부터 죽여버릴거야."
울상이 되어 나무꽂이 앞으로 뛰어가는 소년의 뒷통수를 노려보던 데미안은 소년이 오늘 날짜로 된 출입 기록지를 꺼내자 거칠게 뺏어들었다.
[ 광장 맞은편 오페라홀. G ]
목적지와 마부의 이니셜을 기입하는게 그들의 규칙이었다. 데미안은 맨 아래에 적힌 기록을 확인하고는 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연회가 끝나고 가도 됐었잖아! 제이슨을 보러 간 게 분명했다. 나무 스툴을 발로 걷어찬 데미안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인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당장 저택 입구에 마차 대기시켜."
***
"금방 나올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예, 아가씨."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어 나리는 눈송이를 내내 바라보던 카산드라는 오페라홀의 입구가 보이자 스스로의 힘으로 마차에서 내려 섰다. 파란 털모자 위로 금세 눈이 쌓인다. 마부에게 팁을 쥐여주고 낮은 계단을 오른 카산드라는 작은 손가방에서 티켓을 꺼내 입구의 경비원에게 내밀었다. 명단을 확인한 그들은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요란한 무늬의 스카프를 맨 연미복 차림의 남성이 카산드라의 외투와 모자를 받아들었고, 카산드라는 손가방도 건네주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 공연장으로 향하는 카산드라의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다. 혹독한 추위에 얼었던 몸이 온기에 녹으며 곳곳에서 열이 오른 탓이었다. 로얄석의 입구는 양 끝에 있었지만, 카산드라는 일반석으로 통하는 정중앙의 무거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천을 등받이며 바닥이며 보드랍고 폭신하게 덧댄 너른 홀을 휘, 둘러본 카산드라는 멀리 무대에 불이 켜진 것을 확인하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반항의 의미도, 약혼을 하지않겠단 마음도 아니었다. 단지 약혼을 발표하기 전에, 무대 위에서 춤추는 무용수 제이슨을 만나기 전에, 그녀의 아픈 첫사랑을 제대로 정리할 생각으로 그를 찾아왔다.
- 제이슨은? 그의 꿈은? 그의 치료는? 그에겐 도움이 필요하다, 얘야.
고작 고장난 시계를 고쳐주거나, 양털을 깎아내는 일들로는 제이슨이 도약하는 것에 보탬이 될 수는 없다는걸 그녀는 잘 알고있었다. 알프레드의 말대로 제이슨에게는 제대로된 도움이 필요하고, 그것을 나서서 망칠 생각은 없었다.
"제이슨!"
언 손을 마주잡고 무대를 살피던 카산드라는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제이슨의 이름에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떼었다. 한 걸음, 두 걸음과 세걸음 정도. 그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않았다. 아직 텅 빈 좌석을 한번 더 둘러본 카산드라는 자꾸만 밟히는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그러쥐고는 서둘러 걸었다.
"네, 단장님!"
얼마 못가 그녀의 새 검정구두는 멈춰서야했다. 카산드라는 제 귀를 의심했다. 누군가 제이슨을 불렀고, 그 부름에 그가 답을 했다. 말을 했어. 들을 수 있으니, 대답을 했을거야. 이젠 들을 수 있는거야, 그치, 제이슨? 카산드라의 걸음이 빨라진다. 무대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와 얼마 떨어져있지않은 거리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카산드라!"
데미안의 목소리에 홀 안에 있던 모두의 움직임이 멈춘다. 천장에 위치한 두 개의 샹들리에에 촛불을 켜기 위해 구조물에 매달려있던 관리공이 데미안에게 시선을 주는 사이, 그의 손에서 성냥갑이 떨어졌다. 카산드라의 머리 위로 작은 나무막대기 수십개가 쏟아진다. 성냥갑을 잡기 위해 바등거리던 관리공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반쯤 불이 붙은 샹들리에가 크게 휘청였다.
"제이슨!!"
"카산드라-!!!"
***
"제이슨!"
익숙한 진동패턴에 고개를 든 제이슨은 주변을 둘러보다, 들고있던 1인용 소파를 내려놓았다. 무대 안쪽에서 오른팔을 흔드는 단장의 모습에 그의 걸음이 그리로 향한다.
"네, 단장님!"
경쾌하게 답을 하며 성큼성큼 걷던 그의 멈춘건 귓가를 두드리는 작은 진동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단원들의 걸음소리와 다른, 다급하고 일정치않은 발소리였다. 뒤를 돌아본 제이슨은 천장에 매달려있는 관리공과 그 아래를 지나는 여자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꿈...? 몇 주 전 꾼 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무대 위에 달려있는 샹들리에에는 아직 초가 들어가있지도않았다. 그는 밀려오는 불안감에 무대 앞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카산드라!"
무대에서 성큼 뛰어내린 제이슨은 제 이름만큼이나 익숙한 울림에 고개를 들었다. 카산드라. 누군가 목구멍 안에 풀칠을 하고 솜으로 막아놓은 것마냥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탈 장식이 달린 검은 머리칼과 가느다란 어깨선. 카산드라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쓰는 동안, 제이슨은 여자의 머리 위로 성냥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
푸른 드레스 자락이 빙글,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 위로 가볍게 쓸린다. 카산드라가 제이슨을 향해 몸을 돌린 순간,
"제이슨!!"
"카산드라-!!!"
그녀의 머리 위로 샹들리에가 내려앉았다.
이미 반쯤 초가 타오르던 상태라 부서진 유리와 금속 테 사이로 쓰러진 카산드라의 몸에 불이 붙은건 순식간이었다. 정신을 잃은건지 미동도 없는 카산드라를 향해 달려가던 제이슨은 단장과 단원들에게 붙들렸다. 네 얼굴이 이제야 기억이 났어...네 얼굴이...지독히도 떠오르지않던 네가 이제야 내 눈 앞에 보이는데......
"놔!!! 놓으라고!! 제발 놔!!!!!"
자켓을 벗어들고 불을 끄려고 애쓰는 데미안과 뛰어들어온 관리인들의 모습에 단장은 제이슨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제이슨은 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불구덩이 속에 누워있는 카산드라를 향해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데미안 역시 울부짖으며 자켓을 계속해서 펄럭였다. 불길을 쉽게 잡히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카산드라의 드레스가 눈에 젖었던 덕에 그녀의 몸 속으로는 열기가 덜하다는 것이었다. 관리인 중 하나가 다급히 뛰어와 호스를 겨누었고, 곧 미지근한 열기를 뿜어내며 불길이 잡혔다.
"윽...!"
곧장 달려들어 카산드라의 몸을 짓누르고있는 황금색 테를 들어내려던 데미안은 손에 화상을 입고 주저앉았다. 태어나 한번도 심하게 다쳐본 적 없는 그의 희고 부드러운 손이 감당하기엔 샹들리에의 뼈대가 너무 뜨겁고, 너무 무거웠다.
데미안이 뭔가 받칠 것을 찾는 사이, 단원들을 밀쳐낸 제이슨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기다시피 카산드라에게로 다가갔다. 머리칼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않았지만, 그에겐 지금 그녀가 살아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뜨거운 김이 군데군데 피어오르는 더미에서 샹들리에의 연결 체인을 찾아낸 제이슨은 공연의상인 나무병정의 재킷을 벗어 손에 감고 체인을 쥐었다.
"다들 도와,줘...제발......"
어깨가 빠질 듯한 고통에 잠시 숨을 고른 제이슨은 주변을 둘러싼 단원들에게 울먹이며 부탁했지만, 누구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단장을 카산드라가 이미 죽었을거라 여기고는 제이슨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의 손을 밀쳐낸 제이슨은 울지않기위해 볼을 씹으며 다시 힘을 주었고, 그 곁으로 데미안이 다가와 섰다.
"카산드라가 잘못되면, 너부터 죽여버릴거야. 토드."
카산드라 없는 세상에서 그는 더 이상 무서울게 없었다. 데미안의 협박은 취급도 안한다는 듯 그저 체인을 끌어당기는 일에만 온 힘을 쏟는 제이슨의 눈에는 프리지아 천지를 뛰어다니는 카산드라의 모습만이 계속해서 펼쳐질 뿐이었다.
***
"케인 양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깨어나지 못하는 겁니까...?"
"몸 전체에 큰 화상을 입었고, 그 중에서도 머리와 눈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깨어나는대로 몇가지 확인을 해야할 것 같군요. 깨어난다면 말이지만......"
"눈이...그러니까...눈이 다친거라면......"
"...네. 시력을 잃을 수도 있어요. 머리를 다쳤으니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해도 이상할게 없는 상태입니다. 위로가 되진않겠지만, 즉사하지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일 정도로 많이 다친 상탭니다."
난리통에 진동장치를 잃어버려 제이슨은 다시 조용한 세상에 갇혀버렸다. 그는 박사와 데미안의 입모양을 읽기 위해 노력했고, 카산드라가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박사의 말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군데군데 그을음이 묻은 흰 셔츠 위에 핏자국도 섞여있다. 어딘가를 다친 모양인데도 검사를 받지않으려는 제이슨을 내려다보던 박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단으로 내려갔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는 제이슨의 멱살을, 데미안이 붕대를 칭칭 감은 손으로 채었다.
"너 때문이야..."
...맞아.
"...네가 진작 용서만 했어도..."
내 탓이야......
"네가 그녀를 단 한번만이라도 돌아봐줬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진않았을거라고!!!"
멍한 눈을 들어 데미안의 젖은 얼굴을 바라본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채기가 난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데미안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멱살을 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데미안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누구의 탓도 아님을 알고있었다. 누구의 잘못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모든 일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들의 태생부터가 잘못일 터였다.
제이슨을 만나기로 결정한건 카산드라 본인의 선택이고, 누구의 강요도 없었다. 그녀가 깨어난다면 모두에게 그리 말할 것이었다. 아무도 자책한 필요없다고. 모두 제 탓이라고.
***
"...제이슨?"
문을 열고 들어서던 데미안은 멈춰섰다. 두 눈을 튼튼한 광목 천으로 가려놓은 모습에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 다음은 아픔, 형용할 수 없는 슬픔. 문가에 기대 서있던 제이슨은 제 이름을 부르는 카산드라를 깊어진 눈길로 바라보다 진동장치도 조용히 빼내 주먹 안에 감추었다.
그가 소리없이 카산드라의 곁을 지킨지도 한달이 다 되었다. 카산드라가 저택으로 돌아온지도 그쯤 되었다. 약을 다린 찻잔을 쥐고있던 데미안은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카산드라가 누워있는 침대 맡으로 다가갔다.
"차를 가져왔어."
"...데미안."
"마시기 힘들더라도 다 마셔야해."
제이슨은 카산드라의 손등에 남은 울긋불긋한 화상자국에 이를 악물었다. 그 날 이후로 끊임없이 악몽을 꾸었지만, 현실은 그 끔찍한 꿈보다도 더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서늘하지않은 손으로 데미안의 팔과 손을 더듬어 찻잔을 받아든 카산드라는 억지로 다 마시고는 데미안이 물려주는 마카롱을 한 입 베었다.
3년 전 일이었음에도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벽걸이 시계를 고쳐주고 그 삯으로 마카롱을 받아온 일이 떠오른 카산드라는 살풋 웃으며 데미안의 팔뚝에 손바닥을 대었다.
"나, 어릴 땐 시계를 수리해주고 마카롱을 받기도 했어."
"..."
"전부 제이슨에게 줘버리고 난 남은 가루만 먹었는데......"
데미안은 눈을 돌려 제이슨을 올려다봤다. 진동장치를 빼버린 탓에 제이슨의 눈에 두 사람은 그저 다정한 연인일 뿐이었다. 기대고있던 등을 떼고 조용히 방을 나가는 제이슨의 어깨가 본 적 없이 처져있다. 데미안은 카산드라의 손을 잡아 입을 맞추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토드를 기다려?"
"...이젠 그러지 못해."
"어째서?"
"흉측하게 변해버렸으니까."
"..."
"날 볼때마다 제 탓이라고 울어버릴테니까."
"..."
"그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나여서는 안되니까."
너희는 늘 엇갈리지. 누군가 인도해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계속해서 엇갈리겠지. 그를 아프게 하고싶지않다면, 넌 더더욱 그의 곁으로 돌아가야해. 부르튼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한숨에 카산드라는 입을 다물었다. 제 말이 또 데미안을 괴롭게했음을 깨달았다.
"...이젠 너에게 기대지도않을거야."
"카산드라."
"온전히 너만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 데미안. 난 네게 언제고 상처만 줄 뿐이야."
데미안은 잠시 카산드라의 손에 이마를 대었다 일어섰다. 쉬어. 고요해진 방 안에 홀로 남은 카산드라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이슨이 서 있던 자리로 팔을 뻗었다. 들었니? 아직 거기 있어? 네가 꼭 들었음 좋겠어, 제이슨. 난 이제 네 곁에 갈 수 없어. 이 말을 하려고 널 찾아갔었는데......이제 더 이상은 날 찾아오지마. 날 보며 스스로를 괴롭히지마. 널 놓친건 나고, 앞으로도 그래야해.
***
"또 도망치는거냐?"
짐을 챙기던 제이슨의 손길이 멈춘다. 돌아보니 열린 문 사이로 데미안의 화난 얼굴이 보인다. 제이슨은 책상 위에 올려뒀던 액자를 집어들고, 데미안의 앞으로 가 섰다. 고만고만하던 두 사람의 키가 이제는 제이슨 쪽이 월등히 크다. 어린 동생에게 액자를 내민 제이슨은 헛웃음을 뱉으며 피곤한 기색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 내가 잘하는게 도망밖에 없다. 그건 카산드라한테 전해줘."
"그녀에게 필요한게 뭔지 모르겠어? 그렇게 도둑고양이마냥 몰래 숨어들어 곁을 지키는게 그녀를 위한거라고 생각해? 이렇게 또 멍청하게 도망치는게 카산드라를 위하는거라고 생각하냐고!"
제이슨의 어깨를 밀쳐내며 눈시울을 붉힌 데미안은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이슨을 노려보았다.
"언제나 그녀가 다가갔지. 넌 단 한번도 카산드라에게 먼저 손을 내민 적 있어?"
"..."
"내가 널 싫어했던 이유가 뭔지 알아? 네가 신체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거? 아니. 웨인 가는 그렇게 속좁은 신사들이 사는 곳이 아냐."
"..."
"첫 날, 낯설음과 두려움에 떠는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지않는 네가 싫었어. 그렇게 무심하고 멍청한 채로도 카산드라의 마음을 사로잡고있는 네가 싫었다고, 제이슨 토드."
자켓 주머니를 뒤져 3년 전 훔쳤던 카산드라의 손목시계를 제이슨의 발치로 던진 데미안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무릎을 꿇어 시계를 주워든 제이슨은 그렇게 한참을, 바닥에 이마를 대고 무릎을 꿇은 채로 조용히 울었다.
***
"아가씨. 아- 해보세요."
아- 작게 입을 벌린 카산드라는 로지가 입 속으로 넣어준 딸기를 우물거리다 삼키고는 생긋 웃었다. 턱 부근까지 짧게 잘라낸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걸어 넘기는 손의 절반을 옷자락이 덮고있다. 울긋불긋한 상처가 남은 뺨과 목덜미를 바라보던 데미안의 눈빛이 쓸쓸해진다.
들고있던 액자를 내려다본 그는 그것을 카산드라의 침대 위로 가볍게 던져두고 몸을 돌렸다. 방을 나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로지의 눈빛이 깊이를 모르고 검어진다. 액자 속 사진은 프리지아가 만개한 꽃밭에 서있는 제이슨과 카산드라였다. 제이슨이 저택을 떠나고 두어달이 지나도록 데미안은 사진을 간직하고있었다. 그것을 카산드라에게 돌려준 이유를, 로지는 알아챘다.
"곧 봄인가봐. 햇볕이 많이 따뜻해졌어."
창가에 들여놓은 흔들의자에 앉아 레이스를 뜨던 카산드라는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 창문에 손을 대었다. 겨울엔 차디 차던 유리가 이제는 미지근한 온기를 뿜는다. 고개를 조금 돌려 창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카산드라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간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무언가를 씌워놓은 것처럼 뿌옇고 움직임이 없다. 빛이 눈부시지도 않은지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다.
카산드라가 깨어나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박사는 그녀가 두번 다시는 앞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깨어난게 기적이었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제이슨이 홀연히 떠난 후로 카산드라는 그를 찾지는않았지만, 이따금 그를 기다리던 때처럼 창가에 하염없이 서있었다.
"이 곳으로 오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하며 지냈어. 알프레드의 책상 앞에 제이슨이 앉아있고, 나는 그의 뒤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시간들에 대한 생각."
"...행복하셨겠어요."
"응. 아주 많이."
"제이슨 도련님이 어디 계시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말에 손을 오므려 품으로 끌어당긴 카산드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를 떠나보낸건 나인걸. 앞도 보지 못하고, 흉측하게 변해버리 내 곁에 잡아둘 수가 없어서...그에게 내민 손을 거두어버렸는걸. 로지는 딸기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고, 카산드라의 앞으로 가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가씨와 함께 자란 곳에 가 계시대요. 이젠 춤도 추지 않으시고...다시 아무것도 듣지 못하며 지내고 계시대요."
"...어째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시니까요. 아가씨 곁에 남아있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시니까요. 아가씨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더 이상 편의를 누리는건 죄악이라고 여기시니까요."
"...자격이 없는건 나야, 로지."
"행복에도 자격이 필요한가요, 아가씨? 두 분은 아직도, 너무 어리시네요."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언젠가 그녀가 제 아가씨에게 선물했던 라피스라줄리가 담긴 유리병을 꺼낸 로지는 카산드라의 손에 다시 그것을 쥐여주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병을 감싼 카산드라는 결국 눈물을 떨궜다.
"두 분은 서로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잖아요."
"..."
"곁에 있어주는 데에 필요한 자격같은건 없어요, 아가씨."
***
"..."
제이슨은 우유를 마시다말고 몸을 일으켰다. 다락방 창 너머로 마차 한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셔츠 차림으로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검은 가죽 소파에 작은 종이 한장이 접혀있었다.
"카산드라."
한때나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덕분에 그는 종종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 있게 되었다. 속으로 말을 삼키지 않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곤 했다. 그의 많은 혼잣말 속에서 가장 여러번 불린건 카산드라의 이름이었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들을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이 그녀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했음을 깨달았다.
접힌 종이는 두 사람의 사진이었다. 프리지아 꽃밭에서 환히 웃고있는 어린 자신과 앳된 카산드라의 모습을 거칠어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은 그는 사진을 움켜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카산드라를 웨인의 저택에 두고 이리로 떠나온 후로,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을 다시 찾아와준다면, 그를 찾아와 한번 더 손을 내밀어준다면 두번 다신 놓치지 않을거라고, 꽉 붙들고 절대 놓치지 않을거라고 매일같이 다짐했다. 너무나 많은 기회를 놓쳤고, 다시 자신을 찾아온 카산드라를 위험에 빠트리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한번 더 자신을 찾아준다면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그 손을 잡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
"카산드라!!"
흐드러지게 피어난 노란 꽃줄기들이 무릎 언저리에서 춤을 추는걸, 카산드라는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다. 잔꽃을 빼곡히 그려넣은 단촐한 드레스를 입고, 하얀 레이스가 달린 노란 나들이 모자를 쓴 카산드라를 발견한 제이슨은 있는 힘껏 외쳤고, 그 소리를 들은 카산드라는 주먹을 꼭 쥐었다.
- 네, 단장님!
그 날 우연히 들었던 목소리는 그의 것이 맞았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진중한 목소리. 카산드라는 제 앞에서 숨을 몰아쉬는 제이슨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화상자국을 가리기 위해 끼고있던 장갑을 벗고, 제이슨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댄 카산드라는 눈물을 흘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이슨..."
카산드라의 얼굴을 가리고있던 레이스를 조심스런 손길로 뒤로 넘긴 제이슨은 다짜고짜 그녀의 입에 제 입을 갖다대었다. 오래 기다린만큼 성급했고, 오랜만인만큼 서툴었지만 충분히 뜨거웠다. 서로의 오랜 부재에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알 수 있을만큼, 간절한 키스였다.
"나 이젠 아무것도 보지 못 해."
"...내가 보여줄게. 네가 보지 못하는 세상, 전부 내가 알려줄게."
"너 말 정말 잘하는구나, 제이."
"너한테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3년간 지독하게 연습했어."
"...하고싶은 말이 뭐였는데? 미안해? ...이제 용서할게?"
"아니."
제이슨은 카산드라를 안아 그대로 꽃밭 위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겨 다시 입을 맞췄다.
"평생 나랑 함께 해줄래?"
"...너무 늦게 물어봤어, 너."
"평생 나랑 함께하자."
"응, 제이슨 토드."
END
※ 드디어 끝났어요ㅠ.ㅠ 손목이랑 어깨가 너무 아픈데도 끝내고 나니까 속이 다 후련하고, 제이슨이랑 카산드라 다시 붙여놔서 너무 뿌듯하고...예고했던 데미안 외전+에필로그는 며칠 쉬고 가져오겠습니다. 저 너무 힘들어요 흑흑(누가 시킨거 아님)...그럼 전 이만 총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