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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캐스뎀] 백조의 호수 Ⅰ

ixxrax 2016. 9. 10. 00:41

※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더불어 3대 발레 명곡으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를 차용해 쓴 글입니다. 이미 작성된 <호두까기 인형>과 작성 예정인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더불어 '제이캐스 단편집'에 실릴 작품 중 하나입니다. 출처 미표기 공유, 복사와 표절 모두 금지합니다. 저작권은 작성자인 제게 있습니다. ※




백조의 호수 Ⅰ


제이슨 토드 X 카산드라 케인 X 데미안 웨인



  벽에 달린 램프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희고 길다란 초 위로 화르륵, 불이 붙자 연회장 안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모여앉아 각자의 악기를 매만지던 악사들이 작게 감탄하는 소리에 딕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리처드 존 그레이슨은 토드 왕가의 전속 마법사로 공작 작위까지 받은 청년이었다. 나라 안의 모든 귀족들과 친분을 쌓아 그들의 연회에 늘상 초대되는 유명 인사로, 그는 상대가 어떤 신분이든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호의를 보였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말재주가 좋고, 용모도 수려한 편이라 만인의 사랑을 받는 그에게 관심이 없는 딱 한 사람, 토드 왕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제이슨은 연회장에 들어서다말고 인상부터 찌푸리며 뒤돌아섰다.

  길고 단조로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흰 레이스천을 덮어씌우던 딕은 막 연회장을 나가려는 제이슨을 발견하고 양 입꼬리를 귀까지 끌어올렸다. 딕의 손바닥이 제이슨을 향하자 빛나는 별빛 몇줄기가 왕자의 몸을 감싼다. 돌연 나타났다 사라지려는 제이슨의 눈치를 보며 악보를 뒤적이던 악사들이 또 다시, 작게 감탄을 뱉는다. 그들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인 딕이 손을 거두자 제이슨의 차림새가 달라져있다. 토드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금장 단추와 수술이 달린 붉은 자켓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본 제이슨은 다시 돌아섰다.


  "아름다운 밤이군요, 왕자님."

  "그레이슨. 나 좀 제발 내버려두면 안돼?"

  "손 안 대고 옷을 갈아입혔을 뿐인걸요."

  "...한 대만 쳐도 될까?"

  "이런, 곧 초대된 손님들이 도착하겠네요. 전 바빠서, 이만."


  번쩍이는 불빛이 사라지고나자 딕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요란벅적한 인간. 아니, 인간도 아니지. 한숨을 쉬며 연회장을 빙- 둘러본 제이슨은 입구 근처에 놓여있던 의자에 털썩 앉아 눈을 감았다.

  오늘은 서쪽 나라의 유일한 왕자인 제이슨의 스물두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성 안이 아닌 성 밖, 왕자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라 규모는 작지만 제이슨은 그마저도 번거롭고 귀찮았다. 딕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취소됐을 터였다.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쭉 펴고 팔짱을 낀 채로 한껏 늘어져있는 왕자를 뒤쪽 정원에서 바라보던 딕은 고개를 저으며 화단의 흙 위로 손가락을 놀렸다. 그의 손길이 닿은 자리마다 꽃이 피어오른다. 꽃망울이 작은 폭죽처럼 터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딕은 돌길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연회장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부드럽게 올라가던 입꼬리가 도로 처진다. 진주가 알알이 박힌 황금색 드레스 위로 다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로잘린의 모습에 딕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의 뒤로 늘어서있던 하수인들이 딕에게 허리를 숙여보인다. 그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왕비에게 예를 갖췄다.


  "그대가 연회 준비를 돕고있는 줄은 몰랐는데."

  "...왕비님께서 직접 행차하실 줄도 몰랐습니다."

  "내 아들인 토드 왕자의 생일이니 당연히 어머니인 내가 와야하지않겠는가."

  "..."

  "왕자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가? 리처드 존 그레이슨 공작."


  딕은 본래 북쪽 나라의 사람이었다. 제이슨의 친모가 세상을 뜨기 두 해 전, 과거를 숨기고 서쪽 나라로 오기 전까지 그의 고향에서 로잘린은 그저 어린 공주일 뿐이었다. 오로지 예쁨만 받고 자란, 철없는 공주. 딕의 아버지가 크레이도 왕가의 전속 마법사로 있을 때부터 친했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건 크레이도 왕이었다.

  딕의 아버지가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 아래에서 화려한 불길에 타들어가는 동안, 로잘린은 그녀의 방 창문가에 서서 담담히 딕의 푸른 눈을 내려다보고있었다. 그 때 네가 단 한줄기의 슬픔이라도 비추었더라면......떨리는 손으로 연회장 한구석을 가리키는 딕을,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얼굴한 바라보던 로잘린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레이슨은 갖은 재주와 사랑스러운 미소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밝은 소년이었다. 토드 왕가의 전속 마법사로 추천되어 서쪽 나라로 온 후에도 여전한 모양이었지만, 로잘린 앞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하긴 제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 제가 끔찍이도 생각하는 왕자의 어머니가 되어 눈 앞에 나타났으니......


  "그를 멀리하세요."

  "..."

  "흑마법을 쓰는 자를 부리고도 여태 온건한 왕국은 없습니다."


  할 말을 끝내고 허리를 굽힌 딕은 뒷통수에 닿는 싸늘한 시선에 온 몸의 뼈가 우그러지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 눈 앞의 드레스 자락이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한참을 땅에 시선을 박고있던 그는 통증이 발끝으로 몰려 사라진 후에야 허리를 폈다.

  모든 마법사는 5년에 한 번 주기로 몇 년 후를 내다볼 수 있었다. 아주 잠깐, 그의 인생을 뒤바꿀 정도로 강렬한 사건들에 한해서. 연회장으로 향하는 로잘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딕은 굳은 손을 몇번 쥐었다 펴고는 다시 화단에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마음을 빼앗겼으니 곧 죽게 될거야."


***


  "왕자님, 생축."

  "...생축이 뭐냐?"

  "생.일.축.하 모르십니까?"

  "...드레이크. 그레이슨이랑 함께 멀리 보내줄까?"

  "이전 왕족이었던 저를 감히...?"


  투명한 크리스탈 잔 안에서 녹색 스파크를 튀기는 샴페인을 단숨에 삼킨 제이슨은 티모시 드레이크의 짖궂은 인사에 피식 웃고말았다. 팀은 서쪽 나라의 37대 왕가였던 드레이크 가문의 독자로, 제이슨을 찾아주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친모가 세상을 떠난 후로 스스로 고립되어가던 제이슨을 다시 세상으로 끌어낸 이도 팀이었다.

  영리하고 준수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다. 토드 왕도 드레이크 가문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조언이라면 늘 시간을 내어 경청하곤 했다. 북쪽 나라와 서쪽 나라의 국경 부근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던 딕을 왕궁의 전속 마법사로 추천한 것도, 북쪽 나라의 로잘린 공주를 새 왕비로 추대한 것도 드레이크 가문이었다.

  그 때문에 제이슨은 팀을 어릴 적처럼 완벽히 믿을 수 없었다. 외적으로 보면 그들은 언제나 토드 왕가의 편이었지만, 실상은 저들 가문의 안녕과 실리가 보장되는 쪽으로만 행동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악사들의 연주가 잠시 멈춘다. 제이슨은 잔을 창턱에 내려놓고 몸을 돌려 벽에 등을 기댔다. 화려한 복색의 사람들과 다채로운 음식, 디저트 등이 그의 두 눈 가득 들어찬다. 다들 제이슨 앞을 지날 때면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가 팀에게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들의 상이한 태도에 제이슨은 아예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곧 다시 시작된 연주에 사람들은 파트너를 찾아 왈츠를 추거나 준비된 자리에 앉아 파티를 즐겼다. 한구석에 잔뜩 쌓여있는 선물더미로 시선을 준 제이슨은 짙은 푸른색 빛 한줄기가 요란한 포장에 싸인 상자들 틈으로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살아움직이는 것마냥 통통 뛰어다니는 빛에 홀린 듯, 제이슨은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과 본채를 연결하는 계단 틈으로 사라지는 푸른 빛을 따라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오른 그는 제 서재의 문틈으로 비치는 불빛에 우뚝, 멈춰섰다.


  "..."


  그가 서재를 나올 때, 분명 모든 램프의 초를 끄고 나왔다. 황동 문고리를 잡아 돌린 제이슨은 허리춤에 차고있던 칼의 손잡이에 오른손을 가져다대고 천천히 문을 밀었다. 황금색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가볍게 쓸리며 그를 향해 돌아선다.


  "생각보다 일찍 와주었네요, 왕자."

  "...당신이 왜 내 서재에 있지?"

  "내 하나뿐인 아들의 스물두번째 생일인데, 당연히 와야하지 않겠어요?"

  "지난 2년간 날 개무시했던 마녀는 죽었나보군. 당신은 아버지의 두번째 정부인가?"


  이죽거리는 그의 말에 로잘린의 얼굴이 일순 굳는다. 제이슨은 열린 문 사이를 턱짓으로 가리켰고, 로잘린은 다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호박이 세공된 은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벽난로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따뜻한 불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내게 건방지게 굴어선 좋을게 없을거야, 제이슨 토드."

  "내 어머니를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일 셈인가?"

  "그토록 네 어머니 곁으로 가고싶다면,"

  "..."

  "곧 이루어줄게."


  한때는 아름다웠을 얼굴이 분노와 욕망, 이기로 뒤덮여 사납게 번뜩인다. 칼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준 제이슨은 이를 갈았고, 로잘린은 흥분을 가라앉힐 요량으로 숨을 고르고는 눈을 감았다.


  "선물이야."

  "..."

  "요즘 사냥을 즐긴다기에."


  로잘린의 턱짓에 제이슨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책상 위를 힐끔, 쳐다보았다. 단조로운 무늬의 리본이 둘러진 상자 표면으로 기분 나쁜 푸른 빛이 돈다. 닫힌 서재 문 너머로 점점 희미해져가는 구두 소리에 긴장을 푼 제이슨은 자켓의 금장 단추를 끌러내고 셔츠의 윗단추를 풀었다.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책상 앞에 앉은 제이슨은 묘한 기운이 도는 상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어머니가 없던 지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곧바로 로잘린이 서쪽 나라의 새왕비가 되었다. 그들 나라의 크레이도 왕은 늘 병세에 시달리던 허약한 국왕이었다. 돌연 되찾은 건강이 제이슨은 의심스러웠다. 당장 세상을 떠도 아무렇지않을 정도로 병약하던 크레이도가 쾌차하자마자 토드 왕가는 자애로운 왕비를 잃었다.


  - 그토록 네 어머니 곁으로 가고싶다면, 곧 이루어줄게.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자 램프의 유리가 덜걱, 열린다.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트린 제이슨은 상자의 리본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상자 안에는 석궁이 들어있었다. 검고 푸른 색으로 도색이 되어있는 활을 집어든 제이슨은 두 개의 화살 중 하나를 집어들어 시위에 걸고 문가를 향해 겨눴다.


  "왕자님, 여기 계신...!"


  돌연 벌컥 열린 문에 놀란 제이슨은 석궁을 떨어트렸다. 이미 쏘아진 화살은 딕의 뺨을 스쳐 왼쪽 문에 박혀버렸다. 상처가 벌어져 피가 맺히다말고, 금세 아문다. 박힌 화살을 뽑아든 딕은 굳어있는 제이슨에게 생긋 웃어보이고는 벽난로 앞으로 가 섰다.


  "촉이 망가져 다시 못 쓰겠군요."

  "...공작, 상처가..."

  "왠만한 상처는 금세 아뭅니다. 독이 묻어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아, 왕자님껜 좋은 기회겠네요. 제게 늘 한방을 먹이고 싶어하셨잖아요. 화살이 하나 남은 것 같은데 제가 치명적인 독을 발라드릴게요."

  "살벌한 농담이군."


  촉이 망가진 화살을 벽난로 안으로 툭, 던진 딕은 능글맞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상자 안에 남아있던 화살의 촉이 녹빛으로 변한다. 제이슨은 떨어진 석궁을 주워 도로 상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고개를 저으며 일어선 그는 서재에 딸린 테라스의 문을 열고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소름돋는 공연을 본 기분이었다. 사악한 왕비, 강력한 무기, 살아 움직이는 마법사......푸른 빛을 따라 서재로 올라왔을 때부터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딕은 테라스에 놓인 흰색 철제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밤바람을 맞으며 복잡한 얼굴을 한 제이슨을 볼 때면 자꾸만 제 아버지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구석구석 닮아있었다.


  - 제발 이 아비를 좀 내버려두렴, 딕.

  - 그치만 저를 좀 봐주세요, 아버지! 제가 물건을 들어올리는걸요!

  - 그것 참 살벌한 소리구나. 네 어머니가 생전 아끼던 화병이 조만간 깨지겠어.


  화병이 깨진건 크레이도 왕의 명을 받고 딕의 아버지를 잡아들이러 왕국의 기사들이 들이닥친 때였다. 문가의 장식장 위에 놓여있던 화병이 마루바닥에 제 몸을 던지던 순간을 떠올리던 딕은 별안간 들려오는 서글픈 울음 소리에 고개를 홱, 쳐들었다. 제이슨 역시 그 소리를 들은 듯, 기대고있던 난간에서 허리를 펴고 숲을 향해 돌아섰다.

  서쪽 나라의 밤하늘은 늘 밝고 맑았다. 별이 촘촘히 박힌 사이로 환한 빛을 뿌리는 가느다란 달을 찢어내려는 듯, 날카롭고 애절한 울음이 연이어 울린다.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혼란 주지 않도록 조용히 기사들을 숲으로 보내. 내가 먼저 가있을테니,"

  "위험합니다. 왕자님은 여기 계세요. 제가 둘러보겠습니다."

  "마침 근사한 선물도 받았겠다, 간만에 밤사냥 좀 즐겨보지."


  석궁에 독이 발린 화살을 걸고, 청록색 깃털로 장식된 붉은 모자를 뒤집어쓴 제이슨은 신이 난 표정으로 테라스 난간을 짚고 몸을 날렸다. 딕은 서둘러 난간으로 다가갔다. 여러번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왕자의 행동 중 하나였다. 문을 좀 이용하시지......몸을 한바퀴 굴려 착지하는 제이슨을 향해 손바닥을 뻗은 딕은 모자를 바로 씌어주고, 두툼한 망토를 덮어주었다. 위를 올려다보며 손을 휘- 흔들어보인 제이슨이 마굿간으로 뛰어간다. 알다가도 모를 분이라니까. 서둘러 서재를 빠져나가는 딕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다.


***


  "쉬-"


  호수를 빙 둘러싼 형태의 숲은 길이 좁고 빛이 들지않아 대낮에도 으스스했다. 발치에 걸린 썩은 나뭇가지를 걷어낸 제이슨은 젖은 흙에 표시를 해두고 그 곳에 말의 고삐를 묶었다. 백마가 히잉, 하며 숨을 뱉어내자 왕자의 입김과 뒤섞여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망토로 몸을 말며 걸음을 옮기는 그의 귓가로 짐승의 울음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온다.

  자욱한 안개를 걷어낼 수 있는 것 마냥 손으로 앞을 휘저으며 걷던 제이슨은 갑자기 탁 트인 시야에 몸을 움츠렸다. 구름이 걷혀, 달의 푸른 빛이 사선으로 호수를 내리쬐었다. 각 빛줄기 아래에 웅크리고있던 백조 여러마리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더니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제이슨은 서둘러 석궁을 그들에게 차례로 겨눴으나, 가장 크고 화려한 백조 한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백조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앞으로 두발짝 정도 나선 제이슨은 한쪽 무릎을 꿇고 팔꿈치를 대어 화살을 날릴 준비를 했다. 딕의 독이 묻은 화살촉이 달빛에 번쩍인다.


  "...!"


  제이슨을 향하는 백조의 검은 눈동자에 슬픔이 어린다. 이마 정중앙의 투명한 크리스탈 위로 달빛이 닿자, 날개 깃 끝에서부터 반짝이는 흰 가루가 날린다. 검은 호수의 수면 위로 수천개의 별들이 떨어진 듯, 화사하고 밝은 빛이 제이슨의 시야를 가렸다. 석궁을 내리고 눈을 가리는 그의 손가락 틈새로 길다란 팔과 여윈 어깨를 가진, 검고 긴 머리칼로 몸을 가린 여인이 언뜻 비친다.

  망토를 뒤로 걷어내며 몸을 일으킨 제이슨은 제 눈을 비볐다. 온 나라가 마법에 익숙해진 채로, 마법사들과 어우러져 이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그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 저주, 믿지 못할만큼 빠른 속도로 낫는 상처, 허공에 떠다니는 물건, 손끝으로 만들어내는 빛 따위를 제이슨은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았다. 그가 믿을 수 있는건 오직 그가 행할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매일 저녁마다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자들 몇이 성을 돌아다니며 단번에 불을 밝히지만, 제이슨은 그 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툭하면 딕이 찾아와 손가락 하나로 차를 끓이고, 잔에 따르고, 케이크를 내오지만 그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더욱 마법사들을 불신하고 마법을 불행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방금 그의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은......그가 보아온 사소한 마법들과는 분명 달랐다. 제이슨은 석궁을 그대로 버려두고 호숫가로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에서 발견한 푸른 빛에 홀려 서재로 향했을 때처럼.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이 곳은 토드 왕가 소유의 숲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

  "출입을 허가받지않은 자는 이 곳으로 들어올 수 없어."

  "..."

  "혹 마녀라면,"


  제이슨은 허리춤에 차고있던 칼집을 꼭 쥐며 멈춰섰다. 호숫가로 나와 앉아있던 여인이 도로 물 속으로 들어간다. 검은 눈동자에 여전히 짙은 슬픔이 어려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이 설지 않다. 제이슨은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장 이 나라를 떠나라. 조용히 떠나준다고 약속만 하면, 못 본 척 해줄 것이다."

  "...전 마녀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모습이,"


  순간, 숲 속 깊은 곳에서부터 외침이 들린다. 왕자님! 제이슨 왕자님! 제이슨은 호숫가로 뛰어가 무릎을 꿇고 여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겁에 질린 검은 눈동자 안으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나의 기사들이 오고있어. 서둘러 이 곳을 떠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저는 이 곳을 떠날 수 없어요."

  "제길, 어째서...!"


  여인의 손목을 잡아챈 제이슨은 순간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렸다. 누군가 그를 뒤에서 민 것 처럼, 등이 욱신거린다. 하얗게 부서지던 포말이 잠잠해지자 녹빛 물 속 안에서 이지러지는 검은 머리칼이 보인다. 반대편으로 헤엄쳐 가는 여인을 잡기 위해 팔을 움직이는데, 발목에 수초가 감겨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발버둥을 치던 그의 입이 끝내 열리고, 꼬르륵, 공기방울이 올라가다 터진다. 물결에 가만 흔들리는 그의 몸을 누군가 끌어안고, 엉킨 수초를 끊어낸다.


***


  "왕자님...?"


  석궁을 집어든 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맑고 잔잔한 호수의 수면 위로 비치는 달빛을 제외하고는 호수를 방문한 손님은 없어보였다. 딕은 호수 가까이 내려가 들고있던 램프를 수면 위로 비쳐들었다. 검은 물 속을 헤치기엔 불빛이 약했다.

  뒤따라온 기사 중 한명에게 램프와 석궁을 맡기고 호수 안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는 그의 귓가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말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지자, 잠들어있던 새 몇마리가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왕자님이 근처에 계신 듯 합니다."

  "그치?......왕자님이 호수로 왜 뛰어들겠나. 돌아가지."


  헛웃음을 뱉으며 돌아서는 딕과 기사들의 모습을 건너편에서 누군가 바라본다. 불길한 시선에 고개를 돌린 딕은 손바닥을 뻗어 반대편으로 살을 날렸다. 황금색 빛뭉치가 하얗게 마른 나무줄기에 부딪혀 부서진다. 답지않게 예민하군. 아무 기척없는 숲을 노려보던 딕은 곧 긴장을 풀고 왔던 길을 되짚었다. 로잘린을 만난 탓인가. 고개를 갸웃하는 그의 뒤로 다시 검은 그림자가 진다.


  "...딕 그레이슨. 방해꾼이 늘었군."


***


  "공주님. 아무래도 죽은 것 같아요."

  "...물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야."

  "제가 밟을까요?"

  "그래줄래...?"


  머리칼이 어느새 다 말라가도록, 왕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부풀어 오른 그의 가슴을 여린 손바닥으로 몇번 눌러보다 물러섰다. 단단한 근육 탓에 쉽지가 않았다. 시녀들 중 나이가 가장 많고 키도 커 카산드라를 번쩍 안아들곤 했던 아이가 나서서 발을 들었다.


  "커헉-!"


  흙투성이인 분홍빛 맨발이 그의 가슴에 닿기도 전에, 제이슨은 물을 잔뜩 뱉어내며 허억, 숨을 들이쉬었다. 낮은 탄성을 뱉어내며 후다닥 숲으로 숨어버리는 시녀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굳어버린 카산드라는 서둘러 제이슨의 망토를 끌어당겨 둘렀다.

  연신 콜록이며 겨우 상체를 일으킨 제이슨은 젖혀진 셔츠에 화들짝 놀라 제 어깨를 감싸안고 고개를 들었다. 검고 길다란 머리...겁에 질린 눈망울과 여린 손목.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여인의 뺨에 대었다. 움츠러드는 몸짓 역시 낯이 익다.


  "그대는...대체 누구냐."


  이마에 박힌 수정을 조심스레 쓰다듬던 제이슨은 손을 거두었다. 여인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져 붉은 망토를 적신다. 눈부시던 달빛이 짙은 구름에 가려 숲이 어둠에 잠긴다. 검은 물빛에 소름이 돋아 시선을 떼려는 찰나, 작은 얼굴 하나가 물 위로 떠오른다.


  "카산드라 케인. 남쪽 나라의 공주님이시죠."


  그녀의 말이 끝나자 뒤쪽 숲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이슨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데미안 웨인. 사악한 마법사의 청혼을 거절하셨다가 잔인한 저주에 걸려버렸어요."

  "대체 무슨...!"

  "낮 동안은 백조의 모습을 하고 이 작은 호수에 갇혀있어야해요."


  바로 옆에서 들리는가싶던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달이 뜨면 우리는 본래 모습을 되찾죠. 그러나 한순간일 뿐......"

  "왕자님은 공주님과 우리 모두를 발견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공주님의 저주를 풀어주세요! 그녀를 사랑해줘요!"

  "데미안을 죽여주어요! 공주님의 저주를 풀어주어요!"


  어두운 숲 속 가득 서글픈 멜로디가 흘러넘친다. 그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있던 제이슨은 제 옆에 묵묵히 앉아있는 카산드라를 돌아보았다. 카산드라의 작고 붉은 입술이 몇번 달싹이는가싶더니 곧 아름다운 목소리가 힘겹게 이어진다.


  "부모님은 저를 잃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어요. 한동안 낡은 오두막집에 갖혀있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청혼을 했고......거절의 대가는 바로 이거였죠. 달이 뜨면 잠깐동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달이 저물고 햇빛이 비쳐들면 다시 백조가 되고 말아요. 그의 누이가 저를 가엾이 여겨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말해주시오, 공주."

  "..."

  "내게 그 방법을 알려주시오."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풀릴 것이라고..."


  카산드라는 믿지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고개만 내밀고 종알거리던 시녀들이 일제히 한숨을 뱉어내며 모습을 감춘다. 제이슨은 주먹을 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먼 발치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퍼지며 하늘이 맑아지려한다. 곁눈으로 망토자락이 흘러내리기에 제이슨은 고개를 숙였다.

  가느다란 발목, 얇은 종아리,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허리를 지나 여린 어깨까지 차례로 호수의 물에 잠긴다. 촘촘한 나뭇잎 사이로 햇볕이 한줄기 비쳐들자 곳곳에서 귀를 찢을 듯한 비명소리가 퍼진다. 카산드라의 등이 굽고 그 사이로 커다란 날개가 움트는 것을 지켜보던 제이슨은 몸을 일으켰다. 호숫가로 다가가는 그의 걸음이 힘없이 늘어진다.


  "내 그대를 도와주리다."

  "..."

  "매일 밤, 달이 뜨는대로 이 곳으로 올 것이오."

  "..."

  "입고 먹을 것을 챙겨올테니, 휘파람 소리가 세번 짧게 울리면 모습을 감추지 마시오."

  "..."

  "나를 믿을 수 있겠소, 공주?"


  백조의 머리가 두어번, 위아래로 움직이자 제이슨은 입꼬리가 올라간다. 단추를 채우고 머리를 쓸어넘긴 제이슨은 망토를 주워들었다. 그대로 돌아가려던 그의 걸음이 잠시 멈춘다. 카산드라의 검은 눈망울로 망토를 반듯히 개어 내려놓는 왕자의 모습이 담긴다.


  "휘파람 세번, 잊지 마시오!"


  숲으로 뛰어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녀들이 열심히 헤엄쳐 카산드라의 곁으로 모여든다. 말을 할 수 없어 우는 소리만이 가득했지만, 여느 때와는 다른 톤이었다. 이제 더는, 아침이 절망스럽지 않은 듯, 실로 오랜만에 그들 사이에 웃음이 퍼진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