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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캐스 전력 4회 참가글] White Lake

ixxrax 2016. 10. 3. 22:56

※ 제이캐스 4번째 전력 주제 <비> 참가글입니다. 소재 허락해주신 돌맹이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All Copyright ⓒ Songmme ※




White Lake

제이슨 토드 X 카산드라 케인



  "다 그렸습니다."


  화공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산드라는 몸에서 힘을 빼고 푹신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눈을 감으니 당장이라도 잠에 들 수 있을만큼 피곤이 몰려온다. 초상화 작업이 끝나는 대로 제 아가씨가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카산드라의 시종이 화공에게 따로 작은 보석함을 내민다.


  "아가씨가 주시는거야. 어른들껜 아무 말씀 마."

  "감사합니다, 아가씨!"

  "...고생했어."


  감은 눈을 뜨지 않고 조용히 손을 들어보인 카산드라는 화공이 서둘러 복도를 지나는 소리, 시종 아이가 그 뒤를 따르는 소리, 살짝 열린 문틈새로 들려오는 바깥의 새소리, 벌레소리, 욕실 가득 울리는 물소리, 책장이 가볍게 팔락이는 소리 등을 집중해서 들었다. 이전의 나날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는 날이었다. 케인 가문은 몰락했다. 한 가문이 몰락하는 일이 그리 심각한 사안은 아니었다. 당장 지낼 곳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당장 먹을 것을 빼앗기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여태까지의 삶을 더 이상 지속해나갈 수 없을 뿐. 카산드라의 부모는 일거리를 찾아야했다. 카산드라, 그녀까지도.


  - 아직 우리 가문의 이름이 남아있을 때에, 널 보내고싶구나.

  - 미안하다, 아가. 그들이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에 위안을 삼자.


  카산드라의 부모는 어린 딸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대신 혼처를 찾아주었다. 이젠 이름만 남은 케인이었지만, 여태 쌓아온 그들의 명예와 인덕으로 괜찮은 가문을 찾은 모양이었다. 이틀만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들 저택에 달아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끝으로.

  카산드라는 눈을 뜨고 오렌지빛으로 물든 오후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기 위해 팔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흔들어보였다. 미지근한 햇볕이 손가락 틈을 비집고 끈질기게 비쳐든다. 팔을 툭, 내린 카산드라는 거추장스런 하늘색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새 인부들을 데리고 돌아온 그녀의 시종이 초상화를 조심히 옮겨줄 것을 부탁하고는, 카산드라가 책상으로 사용하는 나무 테이블 앞으로 가 선다. 오래 사용한 흔적이 가득한 앞치마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그림 한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시종 아이가 카산드라의 드레스를 챙겨들고 방을 나간지 몇 분 되지않아, 누군가 또 카산드라의 방으로 들어선다.


  "저 책상이에요. 조심히 옮겨줘요."


  당장 사용해야하는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옮겨둘 모양인지, 미세스 케인의 지시에 따라 낡은 책상이 바깥으로 끌어내진다. 시종 아이가 올려둔 작은 초상화는 카산드라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에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아늑한 방이 곧 다시 고요해진다. 얇은 빛줄기 몇 가닥만이 여전히 끈질기게 머물러있다.


***


  "이리 와서 한번 보래두."

  "저 승마연습하고 올게요."

  "제이슨!"

  "아까 슬쩍 봤어요. 굉장히 미인이던걸요. 이젠 됐죠? 다녀올게요."


  조끼의 단추를 여미고, 허리춤의 벨트를 단단히 조이며 뛰쳐나가는 어린 소년의 뒤로 짙은 한숨이 깔린다. 풍채가 좋은 부인은 철없는 어린 아들을 향해 혀를 차다 벽에 걸린 초상화로 시선을 돌리고는 생긋 웃었다. 그녀는 새 가족이 될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도시에서 이곳으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은 토드 가문 일족은 언제나 친절하던 케인 부부에게 호감을 보였고, 제이슨의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당장이라도 혼담을 넣었을 것이라며 모두에게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로 카산드라를 마음에 들어했다.

  비록 그들 가문의 이름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토드 부부는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흠이라면 신부보다 신랑의 나이가 두 살 어린 것뿐인 결혼을 밀어붙이며, 두 사람은 카산드라를 맞을 준비에 열심이었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당사자인 제이슨은 심드렁하게 지켜볼 뿐이었지만.


***


  "도련님."

  "엉."

  "결혼하신 후에도 이렇게 말에만 마음을 주면 안됩니다."

  "...나 이렇게 어린 나이에 팔려가듯 장가 들어도 괜찮을까?"

  "그런 말씀을 사용하셔도 안되구요."

  "아, 증말 싫은데."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에요. 인품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을만큼."

  "지루할걸."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배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말에 오르려다 도로 내려선 제이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다기보단, 흥미가 없었다. 자신의 모든 시간에 누군가가 개입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말 고삐를 쥐고있던 집사의 주름진 눈꼬리가 접힌다.


  "함께 산책도 하시고, 그림도 그리시구요. 도련님이 아가씨께 승마를 가르쳐주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김샜다. 나 들어갈래."

  "편히 쉬십시오."


  까딱, 고개를 숙여보이는 집사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보인 제이슨은 제 허리까지 웃자란 갈대풀을 마구잡이로 젖히며 걷다 멈춰섰다. 열다섯이면 제법 나이를 먹었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열일곱의 신부가 저 자신보다 한뼘이나 더 키가 크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줄곧 덜 자란 기분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도시에서는 제이슨이 또래들보다 조금 덩치가 큰 편에 속했는데, 작은 시골 마을의 아이들은 뭘 먹고 사는지 열두살 먹은 시종 아이가 그보다 훨씬 컸다. 한뼘......이 정도? 오른손을 허공에 대고 쭈욱 편 제이슨은 제 정수리에 엄지를 갖다대고 눈알을 굴렸다. 얼핏 스쳐본 초상화 속 소녀의 얼굴을 한뼘 높은 위치에, 애써 그려본다.

  아, 몰라. 바보만 아니면 됐지, 뭐. 손사래를 치고 성큼성큼 저택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씩씩하다. 기울어지던 해가 그의 그림자를 길게 잡아끌어 먼 곳까지 그려놓는다. 앞으로 이만큼이나 자랄거야, 하듯이.


***


  "도착하셨답니다, 도련님."


  목을 죄는 짙은색 리본을 살짝 끌어당겨 여유를 낸 제이슨은 굳은 표정으로 문가를 돌아보았다. 온 집안이 다 유난일 때에는 담담했는데, 막상 신부를 맞는 날이 되니 아침부터 입맛도 없고, 늘 즐기던 오수와 디저트도 거를 정도로 속이 불편했다.

  떨리는 손으로 목깃을 정돈하고 새하얀 면장갑을 낀 제이슨은 시종 아이를 따라 1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고개를 자꾸만 밖으로 뺐다. 조금이라도 키가 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어머, 제이슨! 오늘 아주 근사하구나-"


  어머니의 높고 가느다란 음성에 어색하게 웃으며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선 제이슨은 난간 끝의 동그란 장식을 꼭 쥐었다. 금방이라도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오찬 중에 겨우 밀어넣은 누들과 푸딩이 체끼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혹여 신부를 처음 보게 된 날, 그 앞에서 구역질이라도 할까봐 속을 새까맣게 태우고있는 아들의 곁으로 다가선 미세스 토드는 눈치도 없이 억센 손으로 아들의 등을 밀었다.


  "카산드라, 일전에 보낸 초상화로 이미 얼굴을 익혀두었겠지만, 이 아이가 제이슨 피터란다."

  "아. 전,"

  "우욱!!"

  "제이슨!"

  "..."

  "콜록!! 으......"


  카산드라의 주홍색 드레스 자락으로 토사물이 튀었다. 그녀의 뒤로 서 있던 케인 부부와 다이닝룸에서 마침 걸어나오던 토드의 표정이 순식간에 암담하게 굳는다. 제이슨은 한 손으로는 쓰린 배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으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역한 냄새가 퍼져 다시 또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에.


  "...그게...호호, 저 아이가 오찬 때부터 체끼가 있다고 했었는데......"

  "전 괜찮아요."

  "카산드라."

  "괜찮아요, 아버지. 실례가 안된다면 제가 지낼 방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옷을 갈아입고 내려올게요."

  "이층의 밝은 문이 케인 양이 지낼 방이오."


  부채질이 더욱 빨라진 토드 부인에게 괜찮다며 희미하게 웃어보인 카산드라는 모자를 벗고, 장갑도 벗으며 제이슨이 내려온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정적 속에 한숨만이 계속해서 메아리친다.


***


  "아가씨."

  "..."

  "저어기."


  성당으로 가는 길에 들풀과 들꽃을 꺾으며 걷는 카산드라의 곁에서 작은 레이스 양산을 들고 걷던 그녀의 시종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두사람이 돌아보자 나무둥치 뒤로 미처 숨지 못한 제이슨의 외투 자락이 따스한 바람에 살랑이고있다. 카산드라는 표정 변화 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고, 안쓰러운 마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시종 아이도 별 수 없이 그녀를 따랐다.

  나무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제이슨은 한숨을 푹 쉬며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애꿎은 들풀을 거칠게 뽑아대며 몸을 숨겼던 나무둥치에 등을 기댄 그는 흙 묻은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 저...

  - ...하실 말씀이라도?

  - 아, 아니오!


  카산드라가 그의 맞은편 방에 기거하게 된 후로 제이슨은 매일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날 일을 제대로 사과하지도 못했고, 막상 사과하려고 하면 카산드라의 담담하고 차분한 행동 앞에서 번번이 무너지고 말았다. 얼굴도 제대로 쳐다본 적 없으면서, 무슨 말을 걸겠다고......남은 시름이 덜어지기라도 할 듯, 또 한숨을 푹, 뱉으며 몸을 일으킨 제이슨은 눈 앞에 서 있는 제 부인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얼굴을 가렸다. 그 탓에 흙이 얼굴에도 묻는다.


  "아, 아니! 나는, 저기, 저...! 저쪽에 볼 일이...아니, 그 볼 일이...그......"

  "...닦으세요."

  "..."

  "꼴이 엉망이 되었네요."


  살풋 웃는 그녀의 옆얼굴로 오전의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는다. 반듯한 콧날과 얇은 입술을 스치는 꽃향기에 시선을 떨어트리니 카산드라가 쥔 꽃다발에서 풍겨오는 향이었다. 제이슨은 새하얀 손수건을 받아들고 고개를 들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자세하게, 처음으로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이었다. 제이슨은 속에서 피어오르는 뭉근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성당에 가시는 길이라면,"

  "아, 아니오! 아니오! 이만 가봐야할 것 같소!!"

  "..."

  "집으로...스, 승마를 할 시간이 되었기에..."


  어물거리며 두어걸음 옆걸음으로 물러난 제이슨은 곧 등을 돌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입가를 향기로운 손수건으로 가리고 멀리 사라져가는 제이슨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카산드라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널 닮았구나, 래디. 하는 짓이 꼭 네 아기때같아."


  1년 전, 하늘나라로 떠난 애완견을 그리며, 카산드라는 저를 기다리고 선 시종 아이에게로 향했다.


***


  "캐스."


  말 먹이가 든 바구니를 안고 다이닝룸 곁을 지나던 제이슨은 우뚝 멈춰섰다. 캐스? 카산드라의 애칭인가? 돌연 이유모를 감정이 그의 기분을 망친다. 고개를 돌려 다이닝룸 안쪽을 쳐다보니 그의 어머니와 카산드라가 마주 앉아 실과 바늘을 놀리고 있다.


  "내가 뭔갈 잘못한 것 같구나?"

  "잠깐 제게 주시겠어요?"

  "여기있다. 너는 이리도 촘촘히 해내는데 나는 왜 자꾸만 엇나가는지 모르겠구나."

  "마음을 급히 먹지 마세요."

  "마음?"

  "인내해야만 할 때도 있죠."


  제이슨은 소리나지않게 복도를 빠져나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급히 먹지 말자. 인내해야할 순간이 오면 인내하자. 입속말로 웅얼거리며.


  "...캐스."

  "도련님?"

  "엄마야!!!"


  그러다 문득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해버렸다. 캐스, 그녀의 이름을. 늙은 집사가 뒤에서 그를 부르자, 바구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튀어오른다. 이런...바짓단이 더러워졌군요. 바구니를 주워드는 집사를 흘깃 노려본 제이슨은 쿵쿵,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현관으로 들어서다 카산드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하더니 더러워진 바지에 멈춘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드릴,"

  "됐습니다!!"

  "..."

  "화, 화낸거 아닙니다!"


  곧장 2층으로 올라가는 어린 남편의 뒷모습을 쫓던 카산드라는 풋, 웃고 말았다. 볼수록 그녀가 키우던 래디를 닮아있었다. 밖에 다녀오기만 하면 발이 그렇게 더러워져있었는데. 색색의 실뭉치가 든 작은 상자를 들고 다이닝룸으로 향하는 카산드라의 입꼬리가 내내 올라가있다.


***


  "부인에게...부인이 이곳에 온지 한달이 되었소만......그간 내가 많은 신경을...음, 신경은 쓴 것 같은데......뭐, 많은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 같아 이렇게...적소. 펜을 드오. 적소? 적어봅니다. 적는구려. ...적습니다?"


  제이슨은 잉크병에 펜을 던지듯 꽂아버리고 의자 위로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는 부인, 여보, 당신, 하고 중얼거리다 캐스, 하고는 푸헤헤, 어리게 웃으며 몸을 꼬다 의자 위에서 미끄러졌다.


  똑똑-


  어렵사리 쓴 편지를 겨우 접어 봉해서 카산드라의 방문을 두드린 제이슨은 참을성있게 답을 기다렸다. 다시 또 똑똑, 노크를 하기까지는 1분이 걸렸다. 마음을 급히 먹지 말자. 속으로 골백번도 더 했을 다짐을 중얼거리며 1분을 더 버틴 제이슨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 안 가득 화사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감돈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예쁜 색감의 모자 두어개와 핀이 꽂힌 외투, 벽에 기대 세워진 양산 등을 꼼꼼히 훑으며 방으로 들어선 제이슨은 등 뒤로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책상을 찾았다.

  창문 바로 아래에 놓인 낡은 책상 앞으로 얼른 다가간 제이슨은 주위를 경계하듯 둘러보고는 들고있던 편지를 두꺼운 양장본 소설 아래에 끼워놓고는 돌아섰다. 몰래 놓고 갈 생각은 없었지만, 조용히 두고 가는 것도 카산드라를 놀래킬 수 있는 좋은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막 걸음을 떼려는 찰나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문 옆의 장식장이 눈에 띈다. 갯수가 몇개 되지 않는 장신구와 보석함 두어개, 그리고 작은 캔버스와 앤틱 액자가 놓인 장식장 앞으로 다가선 제이슨은 캔버스를 집어들었다.

  따뜻한 느낌의 유화였다. 붓질이 거칠긴 했지만, 사용된 색감이며 그려진 선이며 수준급이었다. Cath. 그림 아래에 휘갈겨진 얇은 이니셜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카산드라는 그림 그리는 취미를 가졌구나. 제이슨은 넓은 초원 위를 뛰노는 털이 수북한 강아지와 저를 닮은 소년, 카산드라를 닮은 소녀를 손가락으로 따라그렸다.


  "...왜 이곳에?"

  "아, 저..."

  "..."

  "미안하오...허락 없이 멋대로 들어와서......"


  그림에 취해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제이슨은 서둘러 그림을 내려놓고는 장식장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나들이를 다녀온 모양인지 햇볕에 들뜬 카산드라의 얼굴 위로 얇은 미소가 번진다. 제이슨은 예상 못한 반응에 입을 굳게 다물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차고 호되게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아직 식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법적으로는 부부인걸요."

  "...그, 그래도..."

  "그 그림이 마음에 드시나요?"

  "..."


  모자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묻는 카산드라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제이슨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그림을 내려다봤다. 언젠가는 꼭 저런 풍경을 당신에게 선물해주고싶어. 속으로만, 속으로만 이야기하며.


  "가져가셔도 되어요."

  "정말입니까?!"

  "네."


  어딘가 늘 어둔 구석이 있던 카산드라의 표정이 환해지는 것을 제이슨은 처음 보았다. 그는 얼른 그림을 안아들고는 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카산드라가 편지를 발견하기 전에 나와야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방에 더 있다간 카산드라를......꼭 안아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예쁘다."


  처음 가까이서 본 그 얼굴보다도, 언제고 눈에 띌 때마다 열심히 담는 어떤 표정보다도. 생긋 웃는 얼굴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제이슨은 제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


  "제이슨."

  "아버지."

  "...아침부터 우유를 그렇게 마셔대면 배탈이 날거다."

  "그치만 커야하는걸요."

  "또 토할 작정이니?"

  "아버지!"


  윗입술을 하얗게 적신 제이슨을 킬킬거리며 놀리던 그의 아버지는 의자에 앉고서는 표정을 바꾸었다. 유리잔을 벌써 다섯잔째 들고있는 어린 아들에게 전해야 할 소식이 비보인 탓이었다.


  "아들아."

  "네. 말씀하세요."

  "새아가와는 어떻니?"

  "...무슨, 무슨...뭐가 어떻다는...뭐가요?!"

  "사이가 좋은지 묻는거란다."

  "그, 그럼요! 얼마나 사랑스...친절한 사람이라고요......"


  자리에 앉으며 남은 우유를 마저 비운 제이슨은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왜 그러세요?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꼬인 턱수염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제이슨의 뒤로 후원에서 들어온 카산드라가 와 선다. 토드는 아들 내외를 번갈아보다 가볍게 휴- 휘파람같은 한숨을 뱉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구나. 네 할아버지말이다, 제이."

  "...네?"

  "유산 상속 문제로 잠시 우리가 살던 곳으로 가야할 것 같다. 너와 나 둘이."

  "그게 무슨...그럼 어머니랑 부인은요?!"

  "...이 곳에서 지내는게 나을 것 같구나. 새아가는 친정도 이 곳에 있으니...그리고 제법 시간이 걸릴 문제라서 말이다."

  "아버지..."


  밝던 하늘이 갑자기 몰려든 어둔 구름에 비를 뿌릴 듯 축축해진다. 달걀이 든 상자를 들고있던 카산드라의 담담한 시선과 제이슨의 불안한 눈빛이 교차하고, 곧 어린 소년의 실망한 표정이 소녀의 가슴을 후벼판다.


***


  "내가 가는게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가 보군요."

  "...그런 게 아니에요."

  "어째서 늘 그렇게 차분하고 담담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

  "아무리 어린 나이에 어린 사내에게 시집을 왔다고 해도...아무리 생판 얼굴도 모르는 남이라 해도, 함께 한 시간동안 나는...나는 당신에게 제법......하아..."


  제이슨은 짐가방을 마차에 싣고 내리는 비를 모자 하나로 버티며 카산드라의 답을 기다렸다. 표현을 잘 못할 뿐이에요, 미안해요, 서둘러 돌아와요. 기대한 말도, 기대하지 않은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카산드라는 어깨에 두른 숄을 더욱 끌어당기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고, 마차는 덜그덕거리며 저택을 떠났다. 쏟아지는 비에 흙바닥이 패이고,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크게 만들어질 때까지, 그녀는 묵묵히 현관 앞에 서 있었다.


***


  2년 후.


  "작은 마님."

  "...집사님."

  "오늘 미사는 비 때문에 취소된다는군요."


  카산드라는 들고있던 실과 코바늘을 내려두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초록이 우거진 저택 초입에 벌써 빗물이 잔뜩 고여있다. 그간 그녀가 떠낸 커튼이며, 숄 등이 방 한쪽 구석을 가득 채우도록 제이슨은 돌아오지 않았다. 작은 마을이어서인지 소문은 삽시간에, 나쁘게 퍼졌다.

  첫날부터 드레스 자락에 토악질을 해댔다더라. 사이가 좋지 않아 각방을 썼대. 몰락한 가문의 아씨니 별 볼 일 있겠는가. 얼굴만 고우면 무얼 해, 아무 것도 없는데. 도시로 새 부인을 얻으러 떠난거라며?

  미사를 드리러 성당으로 갈 때마다 카산드라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애써 못들은 척 해야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삼켰던 울음을 홀로 뱉어낼 때마다 제이슨의 마지막 모습이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그의 오랜 부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문을 그녀 자신도 믿고 싶게끔 했다.


  "아가씨! 아가씨!!"


  방정맞게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시종 아이를 단속한 카산드라는 들고있던 장갑을 매만지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니,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성당을 찾았어요. 늘 가시던 곳은 아니지만, 사람도 없고 조용할 거에요!"

  "...그래. 그리로 가자."


  제이슨이 돌아오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카산드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강아지처럼 뒤를 쫄래쫄래 따르던 모습도, 매일 아침 우유를 몇잔씩이나 들이켜던 모습도, 말 타는 일을 좋아해 틈만 나면 뛰쳐나가던 모습도. 어느 것 하나 떠오르지 않을 때가 없었다.

  우산과 부츠를 챙겨 길을 나선 카산드라는 베일을 두고 나온 것을 떠올리고는 멈춰섰다. 시종 아이를 돌려보내고는 우두커니 서 있는데, 거친 빗줄기 틈으로 희미한 햇볕이 비춘다. 비가 내리는데 어떻게 해가...? 습관처럼 손을 들어 해를 가린 카산드라는 갑자기 어두워지는 시야에 흠칫 놀라며 우산을 떨어트렸다. 뒤로 기우려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휘어감는다.


  "...!"


  떨어진 우산은 발치에 나뒹구는데, 그녀는 비 한방울 맞지 않았고, 넘어지지도 않았다. 익숙한 향기가 콧속으로 훅 끼쳐든다. 낯익은 파란 눈동자가 코 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본다.


  "제이슨...?"

  "...꼴이 엉망이네요."

  "..."

  "내가, 슬픔을 좀 닦아줘야할 것 같은데."


  후드득...토독......우산을 타고 흐른 빗물이 바닥에 떨어져 고이는 소리가 느리게 들려온다. 느리게, 느리게. 제이슨의 어깨를 움켜쥔 카산드라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곧 빗소리에 우는 소리가 섞여든다.


  "...너무...늦었어요."

  "미안해요."

  "매일 곁을 쫓아다니더니..."

  "매일 보이던 놈이 잠시 보이지 않아야 궁금해한다기에."

  "...짖궂군요."


  카산드라의 입가로 젖은 미소가 피어오르는데, 그 위를 제이슨의 더운 입술이 덮는다. 누군가 보기라도 할까봐, 우산을 슬쩍 아래로 당기는 카산드라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온다.




Fin.



※ (더) 부자가 되어 돌아온 제이슨과 카산드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리고 2년동안 제이슨은 키가 엄-청 커져서 이제는 카산드라를 안고 계단 오르락 내리락 왕복 100회도 한답니당. 끄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