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키리로키] Egg-Nog (2)
*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직후 배경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 일원과
<토르 : 라그나로크> 일원을 '제 마음대로' 모셨습니다.
* 로키가 발키리를 짝사랑한다는 저만의 설정.
-
2.
사실 몰랐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 가는 곳이 몇군데 있긴 했지만, 당연히 그 곳을 둘러볼 생각은 없었다. 로키가 의도한건 제 곁에 서 있는 발키리 전사와의 시간이었지, 그녀 앞에 서서 어린아이처럼 형제와의 화해를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아, 입김을 불어 허공으로 '작은 구름'을 띄우는 그녀의 옆얼굴을 슬며시 내려다본다. 술을 끊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만취해 늘어져있는 날은 확연히 줄었다. 멀쩡한 상태에서의 발키리, 그러니까……마지막 발키리 전사인 그녀, 브룬힐데는 사카아르에서와는 달랐다.
'작은 구름.'
'뭐라고 했지, 방금?'
'이거말이야. 아스가르드에는 지구처럼 '겨울'이 없잖아. 여기선 겨울에 입김을 불면,'
하ㅡ, 구름이 생겨. 킥킥 웃고는 제 등을 툭 치던 얼굴은, 영락없이 어린 아이의 것이었다. 언젠가 토르에게서도 본 적이 있는, 순진하고 순수한 맑은 미소. 그때부터였다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냉철한 채로 살아가는게 편하다고 생각하던 로키에게 브룬힐데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그 생각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었는지 알려주었다.
'길을 잃었니?'
'말 걸어봤자 대답 못하는 종족이야.'
'네 귀엔 안 들리겠지만, 내 귀엔 들려서.'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털 상태로 보면 버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거나, 주인이 방심한 틈을 타 뛰쳐나왔을게 뻔했다. 길을 잃어 돌아가지 못했다면 안타깝지만, 버려진 고양이라면 찾아주는 일은 헛수고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 키티. 웃으니까 예쁘네.'
끝내 주인을 찾아 잠시간 그리웠을 품으로 고양이를 돌려보낸 브룬힐데는 로키를 향해 비죽 웃었다. 문득, 손을 잡고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방금 쓰다듬은 고양이의 머리를 두어번 툭툭 두드려보는 것으로 그는 만족했다. 온기, 라는 것. 그것을 느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춥네."
손바닥을 펼쳐 허공에 내미는 브룬힐데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하늘 위를 올려다본 로키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발 아래 밟히는 눈의 소리가 마음을 긁는다.
서둘러, 길 더 얼면 운전하기 힘들어. 주차장으로 향하는 걸음이 급한 것이 거슬렸지만,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우선은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고싶었다.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저와 브룬힐데를 지켜보는 어벤져스와 스타로드의 일행으로부터.
***
"설명해봐."
"무엇을."
"열군데가 넘도록 돌아다녔잖아. 그런데 폐하의 그림자는 커녕, 비슷한 금발 빡빡이 하나 못 본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알잖아."
"그럼 선택해봐."
"또, 무엇을."
"죽고싶어?"
"선택지가 하나일 경우엔, 그리고 그 선택지가 최악일 경우엔 보통,"
도망치지. 브룬힐데는 로키의 입모양을 읽어내곤 주먹을 쥐었다. 민간인이 득실거리는 카페 안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잔을 기울이고있는 장난의 신 - 그것도 이 지구를 집어삼키려했던 장본인 - 을 상대로 한낮에 무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위기상황이 아닌 때의 도심 한가운데에서 소동을 일으키지 않을 것. 그녀가 이곳에 도착하고나서 질리도록 받은 교육의 하나였으며, - 랭귀지, 라는 말을 몇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 사실은 그럴 기력도 없는 상태였다.
'기댈 곳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언제든.'
'폐하께 의지할 일은 없을거예요.'
'아직 내게 기대라고 하지 않았는데.'
'……오 갓. 차라리 캡틴 아메리카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토니 스타크에게 돈을 빌리고 말지.'
'자네 생각보다 매우 재밌는 놈이야. 심심해질 즈음이면 사건도 펑펑 터트려주고.'
눈에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기도 하구요. 스웨터의 넥 부분에 콧등까지 묻으며, 브룬힐데는 카페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껏 당겼다.
"주차 딱지 떼이기 전에 나갈거니까 여유 부릴 생각은 마."
"커피를 술처럼 들이킬 생각도 말고 말이지."
작고 동그란 그린 테이블 위에 음료가 놓인다. 음료 위로 눈이 나린 듯 하얀 크림이 시린 눈가부터 녹인다. 언 손으로 붉은 잔을 감싸자 온기가 번져,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풀리기에 가만 눈을 감아본다.
그녀의 검은 세상 위로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그 가운데 그토록 그리워한 얼굴들이 사르르 잔상이 되어 날린다.
"……!"
제 손등을 톡, 톡 느리게 두드리던 로키의 손가락이 슬며시 접힌다. 눈을 들어 검은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웃는건지 우는건지 모를 표정이 창백한 얼굴 위로 번진다.
"난 몰라. 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저 알 뿐이야. 네 외로움도, 괴로움도 그저 책을 읽어 정보를 습득하듯이 읽기만 할 뿐이지."
"멋대로 굴지 말랬ㅇ,"
"우스워. 토르는 너에 대해 나만큼도 아는게 없지 않나? 그런데도 그는 너를……위로해."
미간에 잡힌 주름이 일순 꿈틀인다. 저를 괴롭히기 위해 자꾸만 환영과 과거를 번갈아 보여주는 제 주군의 동생은, 그렇게 계속 찌푸리기만 한다. 즐거워하지는 않고.
"누가 그래?"
"……."
"넌 내게 위로가 안된다고,"
"……!"
"누가 그랬냐고."
거짓말처럼 주위가 고요해지고, 카페 안을 울리던 종소리와 피아노 선율만이 심장 박동에 맞춰 선명히 들려온다.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예고없이, 정말 시도때도 없이, 어쩔 때는 터무니없을만큼 얼토당토 않은 상황에서도 이따금 들려오곤 했던 소리. 그의 것이었다. 본인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지만.
브룬힐데는 다시 눈을 감았고, 입가에서 잔을 기울였다. 언젠간 후회할지도 모른다. 여지를 준게 맞다, 들이대면 할 말이 없겠지만……당장은 하고싶은대로 하는게 맞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
달큰한 우유 향과 씁쓸한 알콜향이 입 안을 덥힌다. 떨리는 눈꺼풀을 문지르며 마주한 시야에는, 어깨 부근에서 부드럽게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과 비죽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서 춤을 추듯 흩날리는 눈송이가 있었다.
-
* 곧 크리스마스라 뭐든 비슷한 분위기로 써보고싶었는데
그냥 발끝 시린 겨울 느낌만 나는 것 같고…….
*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결말인지 모르겠지만
멱살은 잡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