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캐스뎀] 호두까기 인형 Ⅰ
※ 호두까기 인형에서 영감을 얻어 작성한 글입니다. 원작과 유사한 부분이 발견됐을 때, 표절이라는 오해를 사고싶지않아 미리 고지합니다. 작중 배경은 1860~70년대 생활상을 참고한 가상의 장소입니다. ※
호두까기 인형 Ⅰ
제이슨 피터 토드 X 카산드라 케인 X 데미안 웨인
"후우..."
군데군데 녹이 슨 철제 트레이 위에 직접 뜬 레이스를 깔고, 얼그레이 티 두 잔과 필링이 얇은 연둣빛 마카롱 두개를 올린 카산드라는 그녀가 지내는 다락방으로 향했다. 햇볕이 잘 들어 창가에 늘어놓은 화분들 앞에서 몇 번의 턴을 돌던 제이슨은 숨이 모자란 듯, 심호흡을 하며 축 늘어졌다. 카산드라는 티테이블에 트레이를 올려두고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부채질을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아? 괜찮아. 카산드라의 손을 끌어다 제 붉은 뺨에 댄 제이슨은 눈을 감았다. 열을 식혀주면서 동시에 흥분시키기도 하는 서늘한 손.
그는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상대의 입술을 바라보는 것으로 무슨 말인지를 파악하는 제이슨에게 발레는, 감히 그가 해낼 수 없는 것들 중 가장 큰 난관이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도 없고, 이런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의 재능을 평가해줄 이도 없어, 제이슨은 가끔 그의 욕망을 억누르려 며칠간 방에 스스로를 가두기도 했다. 진정될 줄 알았건만 오히려 악착같이 연습에만 전념하는 제 모습을 한번 더 확인하는 꼴이었다. 높게 잡은 목표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 내가 도와줄게.
마을의 몇 안되는 아이들은 저들끼리 무리를 만들어 놀았고, 강한 자존심과 나이에 비해 높은 이상, 오랜 외로운 생활로 자연스레 무리에서 도태된 제이슨에게 말을 걸어준 이는 카산드라였다. 빠른 속도로 깊게 친해진 두 사람은 사실 서로 친구가 되기에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시계공인 알프레드에게 입양된 카산드라는 농가의 아이들처럼 농사일을 도울 필요가 없었고, 인근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홀로 살아가는 제이슨에게 남아도는 것 역시 시간이었다. 또 카산드라는 조기 교육이 부족해 또래보다 말솜씨가 부족했고, 제이슨은 수다스런 사람과 어울리기가 곤란했다. 가끔 알프레드가 도시로 나가 어느 부자들의 빈티지한 컬렉션쇼에 초대받는 날이면, 두 사람은 며칠밤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카산드라는 제이슨을 위해 풍금을 연주했고, 제이슨은 카산드라의 손놀림을 주시하며 유연한 춤사위로 작은 다락방을 꽉 채워놓았다.
나흘 전, 출장을 나갔던 알프레드가 돌아오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마을 사람들의 씀씀이가 넉넉해져있었다. 작은 밭 두어개를 사이에 둔 돼지농장에 아침 일찍, 수리를 마친 시계를 가져다준 카산드라는 그 댁 작은 아가씨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티백과 마카롱을 품에 소중히 안고 그들의 은신처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녀는 알프레드의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로 가끔 작은 용돈벌이를 하곤 했다.- 아래층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녹빛 넝쿨이 그려진 낡은 자기 주전자에 물을 끓여, 작년 알프레드에게서 선물받은 찻잔에 조심스레 차를 우려내는 동안 카산드라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알프레드의 작업대는 나무 틀로 짜인 창문 앞에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곳은 종종 카산드라의 차지가 되곤 했다. 그곳에 앉아 저렴한 가격으로, 혹은 식재료나 디저트, 작은 악세사리를 받으며 잔고장이 난 시계를 고쳤다. 가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에게 그 자리는 지켜야할 소중한 것 이상이었고, 요즘들어 그 자리에 제이슨이 앉는 상상을 자주 한다. 가족. 그렇게 된다면 우린 가족이 되는 거겠지. 제이슨의 꿈은 잘 알고있지만, 카산드라는 그가 유명한 무용수가 되는 것보다 평범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가 꿈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그녀가 그를 먹여살릴 생각도 있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제이슨, 난 뭐든 할 수 있어.
"...!"
제이슨이 눈을 감았던 사이, 상념에 빠져들었던 카산드라는 제 어깨를 가볍게 감싸는 온기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푸스스, 부서지는 듯한 제이슨의 미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얼른 고개를 돌린 카산드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그의 손을 이끌어 티테이블 앞에 앉혔다.
너는 단 한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까? 내 미래에 늘 네가 있는 것처럼, 네 미래에도 내가 있을까?
옷깃이 많이 닳은 잿빛 셔츠 위에 카산드라가 직접 재봉을 한 밝은 색 베스트를 꿰어 입은 제이슨은 알맞게 식어 마시기 좋은 차를 후룩, 삼키고 이어 마카롱도 한입에 우적우적 삼켜버렸다. 소년. 언젠가 알프레드가 카산드라를 재우며 제이슨은 천상 소년이라고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디로 튀어도 이상하지 않은, 가진 것이라곤 자유로움 뿐이지만 그마저도 부족하다고 생각할...소년. 카산드라는 알프레드의 속뜻을 이해했다. 제이슨은 언제고 이 시골마을을 떠날 수 있고, 그럴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니, 너무 많은 마음을 내어주지 말라는.
"제이슨."
"..."
"이것도 먹어."
카산드라는 제 몫의 마카롱을 제이슨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가끔 너무 늦어요. 저 애에게 제 모든 것을 주고싶다는 생각을...이미 오래 전에 해버렸는걸요.
방금 전까지만해도 눈부시던 햇살이 사그라들어, 방 안이 어둑해진다. 눈이 내릴 참인가, 제이슨은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을 쌉싸름한 찻물로 헹궈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가게 문을 일찍 오픈해야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엔 문을 닫을테니 대신 이브날 평소보다 오래 오픈하기로 정해둔 터였다. 모처럼의 휴일을 얻었으니, 카산드라와 하루종일 함께 할 생각이었다. 제이슨은 카산드라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고, 겉옷을 챙겼다.
"다녀와."
귀를 덮는 모자를 뒤집어쓴 제이슨은 카산드라를 한번 꼭 안아주고는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 속으로 사라졌고, 카산드라는 한참을 문가에 머물렀다.
***
"요리 솜씨가 갈수록 느는구나."
"..."
"집 안에만 있으니 답답하지않니, 캐스?"
돼지의 앞다리살을 얇게 저며 묽은 바베큐 소스에 한참을 졸인 후 볶은 양파와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여 내놓은 음식을 순식간에 비운 알프레드는 미안한 웃음을 보였다. 혼자 살 때는 집을 비우는 일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카산드라를 데려온 후로는 그가 집을 비우면 카산드라 혼자서 집을 지켜야했다. 근래에는 제이슨이 있어주어 마음이 놓이긴했지만, 그렇다고 신경이 쓰이지 않는건 아니었다.
"신경 안쓰셔도 돼요. 오늘도 잠깐 외출했는걸요. 건너 돼지농장에 갔다가 시계 수리 비용으로 받아온 거에요, 이 고기. 그 댁 작은 아가씨한테서 디저트도 받았어요. 할아버지 몫도 남겨놨으니, 식사 끝나고 드세요."
카산드라는 불안할 때나, 고민이 있을 때 말이 길었다. 그리고 대개 알프레드는 그냥 모른 척 눈을 감아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카산드라가 말을 마치고도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알프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어둔 옷걸이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소식에 카산드라의 기분이 풀리길 바라며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웨인 가에 다녀왔단다. 그 댁 젊은 주인이 요즘 부탁이 잦구나. 외로운게지...부모를 일찍 여의었으니 나같은 늙은이에게 기대고싶을만도 해."
"..."
"그 댁에서 내게 일자리를 준다는구나. 도시 번화가 중심에 웨인 소유의 가게 하나가 비는 모양이다."
"하지만,"
"너에게 묻기 전에 이미 수락했단다."
카산드라는 저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례한 행동인건 알지만, 제이슨을 두고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와 그녀의 사이를 아는 알프레드가 이렇게 무모하게 두 사람을 찢어놓을 리가 없었다. 상처받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카산드라에게 웃어보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보렴, 얘야. 자리로 돌아오는 알프레드의 손에는 미색 종이 몇 장이 들려있었다. 그는 그것을 카산드라에게 내밀었다.
"그는 내게 친자식같은 너와 제이슨이 있다는 걸 알고있단다. 너는 이미 정식 입양절차를 밟아 내 양녀로 들어온 상태고, 나는 파양을 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너는 웨인 가의 젊은 주인을 단순 후견인으로 두게 되겠지만...제이슨은 고아잖니."
"..."
"이제 제이슨은 토드가 아닌 웨인을 성씨로 갖게 될거야. 그렇게 되면,"
"무용을 배울 수도 있겠네요? 발레단에 입단할 수도 있을거고, 가능하다면 제이의 병도...고칠 수 있겠네요?"
"그래. 바로 그것 때문에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제이슨은 병을 고치지 않아도 제법 훌륭한 무용수가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는 네 손놀림과 입모양만 보고도 박자를 맞출 줄 알고, 너도 정식 교육을 받아 연주 솜씨가 늘어난다면, 너희 둘은 서로에게 완벽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을거야."
알프레드에게서 받아든 서류는 알프레드와 웨인 사이에 오간 모든 대화를 공증할 수 있는 변호사의 서명을 싣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카산드라의 눈치를 살피며 와인을 한모금 삼켰다. 카산드라는 이 작은 마을의 미적지근한 사람들에게 제법 정을 붙이고 있었다. 때문에 쉽게 떠날 생각을 하진 못하겠지만, 제이슨을 위해서라면 아마 수락할 것이라는게 알프레드의 셈이었다. 그는 카산드라가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럴 자격이 충분한 아이고, 필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볼게요."
흔들리는 촛불을 멍하니 보던 카산드라의 검은 눈이 창밖으로 향한다. 흩날리는 눈발 새로 춤추는 제이슨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마법에 걸린 것마냥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발레인형같은 제이슨이.
***
"...제이슨?"
카산드라는 늘 유리등에 초를 켜놓고 잠들었다. 제이슨이 밤중에 올라오다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깊은 잠에 못 드는 그녀는 보통 제이슨이 올라오면 부스스 일어나 그를 반겼다. 그런데 오늘은 제이슨이 올라오는걸 느끼지 못했다. 카산드라는 들창으로 어렴풋 느껴지는 새벽기운에 눈을 떴고, 창가의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은 제이슨을 발견했다. 그는 카산드라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창밖을 바라본 채로 가만가만, 몸을 흔들고 있었다.
"..."
촛불은 사그라들어있었고, 서랍에 넣어뒀던 알프레드의 서류는 제이슨의 허벅지 위에 놓여있었다. 일을 하다 다친 모양인지 그의 손등이 붉게 부어올라있다. 카산드라는 언제나처럼 침착한 표정으로, 묽은 연고와 붕대를 챙겨들고 그의 앞으로 가 앉았다.
"..."
"..."
침묵 속에서 제이슨의 상처를 치료한 카산드라는 자신이 감은 붕대 위를 조심스레 쓸었다. 그제서야 그의 시선이 카산드라에게 닿는다. 고개를 들어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빗어넘긴 카산드라는 제이슨의 푸른 눈을 곧게 마주하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가고싶어?"
"..."
"네가 원하면, 가자."
"..."
"너를 따를거야.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제이슨은 카산드라의 머리를 감싸 제 무릎에 뉘이며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얀 눈이 밤새 폭신하게 깔려 그 위에 드러누우면 따스할 것 같았다.
...카산드라가 잠들어있는 다락방으로 올라오기 전, 그는 다이닝룸에 앉아있던 알프레드와 얘기를 나눴다.
[ 너한테 아주 좋은 기회가 될거야, 제이슨. ]
[ ...저는 발레단원이 될 수 없어요, 알프레드.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걸요. ]
[ 고칠 수 있을거야. 그의 재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란다. 그리고 카산드라 역시 정식으로 교육을 받게될게다. 카산드라의 연주에 맞춰 연습하다보면 무대에 오를 날도 오지 않겠니. ]
[ 카산드라도 교육을 받을 수 있나요? ]
[ 물론이지, 얘야. 이런 시골에서 썩히기엔 너희 둘의 재능이 너무 훌륭하구나. ]
필담이었지만, 제이슨은 알프레드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실 그에게는 카산드라의 앞날이 훨씬 중요할 것이다. 카산드라를 데리고 나가기 위해서는 제이슨이 필요하다. 귀머거리 고아 소년을 아무 의심없이 무작정 입양하겠다는 자들이 세상에 존재하겠는가. 알프레드가 그들을 잘 구슬렸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이슨은 카산드라를 위하는 알프레드의 마음 대신 제 속을 들여다봤다. 알프레드가 그를 이용하는 것은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게 좋은 의도건, 나쁜 의도건 간에. 열다섯이나 먹고선 이만한 일에 상처받을 만큼 여리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파격적인 조건들을 곱씹어보았다. 입양, 교육, 치료, 지원...살면서 두 번 다신 안 올 기회.
기회. 사람들은 어째서 기회가 오면 꼭 붙들까? 내 삶을 바꿔놓을테니까. 이 곳에서 계속 지낸다면 그는 바트의 술집을 물려받거나, 아무 농가의 잡심부름꾼으로 들어가 카산드라와 함께 여생을 마무리하고 말테지만, 웨인의 양자가 된다면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무대 위 공중을 하염없이 날아다닐 수 있는 우아한 무용수. 희미한 기억 속에서 제 어미가 그랬던 것처럼. 유명해지면, 발레로 유명해지면 제 어미가 저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회. 기회가 왔으니 잡아야지. 꼭 붙들어야지. 바꿔야지, 내 삶을.
[ 감사해요, 알프레드. ]
제이슨은 카산드라의 검은 머리칼 새로 손가락을 얽으며 새벽 어스름에 부신 눈을 감았다. 잠을 못잤더니 너무 피곤했다. 며칠 뒤면 새로운 삶이 펼쳐질 거란 생각에 가슴이 뛰어 정신은 멀쩡했지만, 긴장과 설렘에 뭉쳐있던 근육이 풀어지자 온 몸이 나른해진다.
카산드라를 가볍게 안아들고, 그녀의 침대로 향한 제이슨은 잔꽃무늬의 하얀 이불 속으로 숨어들며 눈을 감았다. 지붕 위에 쌓여있던 눈들이 떨어지는 소리, 아래층 벽난로의 장작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소리, 그리고 카산드라의 숨소리까지. 제이슨은 자신이 들을 수 없었던, 앞으로 듣게 될 모든 소음을 상상하며 잠에 들었다.
***
허연 입김을 뿜으며 알프레드를 따라 걷던 카산드라와 제이슨은 이른 시간임에도 북적이는 스테이션과 세련된 사람들의 옷차림, 화려한 기차역 내부에 어깨를 움츠리며 서로의 손을 꼭 붙들었다. 군데군데 눈이 녹아있어 카산드라와 제이슨의 양말에 흙탕물이 튄다. 그게 저들과는 다르다는 표시같아 카산드라는 어깨를 더 움츠렸다. 마차에 올라 부산스런 주변 광경에서 겨우 눈을 뗀 것도 잠시, 곧 그들 앞에 거대한 저택이 나타났다.
"환영합니다, 알프레드."
"마중나와줘서 고맙군요."
"...아이들입니까?"
"카산드라와 제이슨이요."
"도련님을 뵙기 전에 단장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들을 맞은 서늘한 표정의 남자가 카산드라와 제이슨을 저택 구석으로 안내했다. 알프레드를 불안하게 돌아보는 카산드라의 어깨를 안아주며 제이슨이 앞장섰다. 긴 복도를 여러번 꺾어 돌아 남자가 거대한 문을 당겨 열자, 팔을 걷어붙인 채로 바닥과 계단 난간을 닦던 하녀 몇이 서둘러 일어나 그들을 맞는다. 그들의 시선에 경외감이 담겨있는 것을 애써 무시하는 카산드라와 달리 제이슨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는 구정물에 손을 담글 필요없는 귀한 몸이 되었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그들을 아는 체도 않고, 곧바로 왼편에 위치한 방으로 카산드라와 제이슨을 안내했다.
"지금은 비어있는 방이니, 저쪽 욕실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씻고 나오면 갈아입을 옷이 준비되어있을 겁니다."
"...같이 씻어도 되나요?"
"네. 그럼 한시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카산드라는 겁에 질려있었다. 책에서 읽었던 상류사회 사람들의 생활상이 부러웠던 적은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그 안에 속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동경하던 것이 아니어서일까? 그리고 웨인의 저택은...생각보다 음울했다. 화려하다기보다는, 그저 금칠이 된 물건들이 자리잡고있을 뿐인 느낌을 풍겼다. 따뜻하고 포근하던 그녀의 마을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제이슨은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제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는 모습에 의아했다. 왜 떠는거야, 캐스?
카산드라는 제이슨의 옷을 모두 벗겨준 후에야 제 옷을 벗었다. 드레스라고 할 것도 없는 낡은 옷가지를 발끝으로 건드리던 카산드라는 한숨을 뱉으며 얼굴을 가렸다. 뭐가 불안한거야, 카산드라? 이제 제이슨은 그의 꿈을 이룰 수 있고, 난...나는...카산드라는 제이슨이 저를 꼭 안아준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그들을 데려다 놓은 곳은 크고 깔끔한 방이었다. 그의 말대로 누군가 사용했던 곳인 듯, 군데군데 생활의 흔적이 묻어있는. 물소리가 나는 욕실로 향한 카산드라와 제이슨은 한참을 서 있기만 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눈부신 욕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탓이었는지. 카산드라의 눈에는 옥색 물이 가득 고여있는 하얀 욕조와 대리석 타일 위로 그들이 사용하던 나무욕조가 겹쳐보였다. 우리 이제 정말 다른 삶을 살게 되는걸까? 망설이는 카산드라를 두고 제이슨은 곧장 욕조로 뛰어들었다. 카산드라를 향해 손짓하는 그의 새파란 눈이 전에 본 적 없이 빛나고 있다.
"...너는 좋니?"
"..."
"좋구나, 너는...난 이 곳이 낯설기만 한데."
제이슨에게 등을 돌린 채로 중얼거린 카산드라는 눈을 감고 물 속에 머리를 담궜다. 제이슨이 좋다면, 나도 좋아해야해. 제이슨이 원한다면, 나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할거야. 카산드라의 검은 머리칼이 물에 물감을 푼 것 마냥 부드럽게 떠오른다.
소년의 손이 소녀의 등에 닿는다. 캐스, 우린 이 곳에서 영원히 행복할거야. 등골을 훑은 손가락 끝이 부드럽고 통통한 그녀의 둔부 근처에서 춤을 춘다. 꼬륵, 숨을 급하게 뱉어내며 고개를 쳐 든 카산드라는 다시 허억, 숨을 들이키며 다리를 꼬았다. 춤을 추듯 그녀를 끌어안는 제이슨의 등 위로 카산드라의 손톱이 박힌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물이 넘쳐 대리석 바닥에 요란하게 부딪혔다. 문 틈 사이로 두 사람의 격정적인 춤사위를 지켜보던 시선이 카산드라의 낡은 드레스로 향한다. 그녀가 끌러 둔 낡은 시계를 주워드는 손이 지나치게 하얗고 가늘다.
잠시 가만 서 있으니, 시계 초침 소리와 욕실 안에서 들리는 신음소리가 뒤섞인다. 미간을 찌푸리며 시계를 손에 꼭 쥐고, 그는 방을 나섰다.
"...천박한 것들."
END
※ 1부 끝...욕망의 제이슨과 촌뜨기 카산드라였습니다......이만 총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