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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더불어 3대 발레 명곡으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를 차용해 쓴 글입니다. 이미 작성된 <호두까기 인형>과 작성 예정인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더불어 '제이캐스 단편집'에 실릴 작품 중 하나입니다. 출처 미표기 공유, 복사와 표절 모두 금지합니다. 저작권은 작성자인 제게 있습니다. ※
백조의 호수 - 프롤로그
제이슨 토드 X 카산드라 케인 X 데미안 웨인
어둑한 복도 끝, 작고 낡은 방 안. 쇠사슬이 마루바닥에 쓸리는 묵직한 소리가 복도까지 울린다. 별을 흩뿌린 듯 반짝이는, 칠흑같은 어둠을 머금은 망토를 뒤집어쓴 사내의 구둣발이 방 앞에서 멎는다. 끼익- 이음쇠가 낡은 탓으로 나무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기괴하다.
더러워진 하얀 드레스 자락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리는 여린 소녀의 왼쪽 발목에 녹슨 사슬이 채워져있다. 유난히 밝은 달빛에 푸르스름한 빛을 띄는 소녀의 검은 머리칼을 희고 메마른 손으로 쓰다듬은 사내는 소녀의 군데군데 상처가 난 이마에 퍼석해진 입술을 갖다대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소녀의 체향이 그의 주름을 지우고, 퍼렇게 질린 입술을 붉은 빛으로 채우며, 늙어 늘어진 살결을 당겨주었다. 사내의 얼굴은 소녀와 동년배로 보일 정도로 어려졌다. 한두번 본 것이 아닌 듯, 소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이 좀 바뀌었나?"
"..."
"넌 내게 영생을 줄 수 있어."
"..."
"나도 네게 무한한 아름다움과 영원한 시간을 줄게."
고개를 든 소녀의 경멸하는 눈빛에 사내는 짙은 한숨을 흘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손을 뻗자 방 안의 창문이 모두 덜컹이며 열렸다. 거센 바람에 소녀의 드레스 자락이 흩날리고, 사내의 망토가 펄럭였다. 바깥에서 외마디 비명이 수차례 들리는가싶더니 깃이 흰 백조 수마리가 달빛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소녀는 놀란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다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의 푸른 눈이 빛나자 방 안을 휘몰아치던 바람이 그친다. 소녀의 검은 눈망울에 두려움이 맺히자, 사내의 입가에는 삐딱한 미소가 걸린다.
"카산드라."
"..."
"내게 오지 않으면,"
"..."
"평생 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거야."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녀의 부드럽게 뻗어있던 손가락 끝에서부터 깃털이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곧 어깨죽지까지 빠른 속도로 크고 무거운 날개가 생겨났다. 순식간에 사라진 제 두 팔을 찾는 그녀의 눈앞엔 눈부신 날개만이 펄럭이고 있을 뿐이었다. 여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도록 소녀의 목소리를 앗아갔던 사내는 손가락을 움직여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공주. 나와 결혼해주시오."
갈비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흰 날개로 제 몸을 감싼 소녀는 숨을 몰아쉬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겐...영원히, 죽어도...가지 않을거예요."
폭풍이 휘몰아치듯, 방 안의 모든 가구가 허공으로 날아다녔다. 덜컹이던 문짝도, 소녀의 드레스도, 낡은 쇠사슬도 모두 바람에 실려 창밖으로 날아가버렸다. 바람이 멎은 방 안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있는 크고 아름다운 백조 한마리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난 절대 널 포기하지 않아.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
"넌 사랑을 믿니?"
오딜로의 금빛 머리칼이 햇볕을 받아 물결쳤다. 넓은 호숫가의 나무둥치에 앉아 백조의 날개를 쓰다듬던 그녀는 황홀경을 본 사람처럼 사르르, 웃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가 너무 가여워."
"..."
"하지만 난 너도 가엽단다."
행복에 겨웠던 그녀의 표정이 변하여 안타까움을 담는다. 따스한 햇볕 아래 오딜로의 가슴께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백조가 날개를 한번 푸득이더니, 눈물을 흘린다. 오딜로는 엄지손가락으로 백조의 머리 한가운데를 지그시 눌렀고, 그녀가 손을 뗀 자리에 투명한 백수정이 남아 빛났다.
"진실한 사랑을 만나면 데미안의 저주가 풀릴거야."
"..."
"마녀로 오인받아 죽을 뻔한 날 살려주었잖니, 카산드라. 은혜를 갚은 것 뿐이야."
"..."
"물론 마법을 부릴 줄은 알지만, 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어. 그걸 알아준건 너뿐이였어. 가엾은 공주...케인 왕가에 유능한 마법사가 단 한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네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
"난 데미안을 설득할 수 없어. 미안해. 다만 진실한 사랑을 꼭 찾으렴, 카산드라."
"..."
"나도 날 영원히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영생을 살거야."
"..."
"잘 있어, 카산드라."
오딜로가 떠난 자리를 잠자코 바라보던 백조는 날개짓 두어번으로 수면 위에 자리를 잡았다. 빽빽한 침엽수로 사방이 둘러싸인 호수는 사람의 형상을 하지 않고선 벗어날 수 없었다. 크고 무거운 날개는 아름답기만 할 뿐, 그녀의 탈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곳을 벗어난다해도 갈 곳은 없었다. 그녀가 살던 남쪽 나라는 짙은 어둠에 잠긴지 오래였다. 하나뿐인 공주를 잃은 왕과 왕비는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백성들은 온화했던 공주의 실종으로 비탄에 잠긴 채로 오랜 잠에 빠졌다.
달이 뜨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숲 속을 벗어날 방도는 없었다. 함께 저주에 걸린 시녀 아이 몇 명과 함께, 깊은 밤, 알몸으로 숲 속을 뛰어다녔지만 미로에 갇힌 듯, 그들은 헤매기만 했다.
오딜로가 떠난 후에야 카산드라의 곁으로 다가온 다른 백조들은 서로의 길다란 목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물방울이 떨어져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소리만이 적막한 숲을 흔든다.
***
"날 도와주겠다는 약속만 해준다면, 죽어가는 네 아비에게 새 생명을 주겠다."
"뭐든...뭐든 할게요. 내 아버지 말고는 그 누구도 이 나라의 왕좌에 앉을 수 없어요...그렇게만 해준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게요."
퀭한 눈가와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사내는 손을 뻗어 얇은 턱을 쥐었다. 핏기 없는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내게 영생을 가져다줄 작은 소녀가 있어. 내 청혼을 거절하기에 저주를 걸었는데, 어리석은 내 누이가 그녀를 가엾이 여겨 저주를 풀 방도를 알려주었지."
"..."
"제이슨 토드. 서쪽 토드 왕가의 유일한 계승자다. 그 자의 어미를 죽이고, 너를 토드 왕가의 왕비로 만들어주겠다."
"...내가...그 자의 새어머니가 되는거군요...?"
"멍청한 한량같은 왕자가 내 누이 오딜로에게 청혼을 하도록 만들어."
"그가 당신의 소녀에게 사랑을 맹세할 모양이군요."
"난 똑똑한 인간이 좋아. 아무런 힘이 없어도 살아남을 줄 알지."
"...좋아요. 꼭 그렇게 만들게요. 이제 아버질 살려주세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기세로 대들던 소녀의 귓가로 폭죽소리가 우렁차게 울린다. 창가로 다가가 문을 밀어 연 소녀의 눈 앞이 색색깔의 꽃잎과 리본, 기뻐하는 사람들의 얼굴로 가득 메워졌다. 뒤돌아 사내를 찾던 소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대신 문가로 달려와 국왕의 쾌차를 알리는 시녀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 당신은 어디까지 앞을 내다볼 수 있죠? 우리의 계획은 성공하나요?
***
고개를 들어 희미한 달빛을 보렴. 너는 다시 살아날거야. 따스한 햇볕도, 밝고 맑은 호수도 필요없어. 오직 달빛만 있으면, 온 세상이 밤이었으면, 모든 하루가 차고 찬 밤이었으면. 닿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이 빛 한줄기에 날 다시 만날 수 있다니...얘들아, 내 끔찍한 저주를 과연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풀리긴 할까? ...아니, 아마 난 이대로 죽어가고말거야......
***
진실한 사랑? 누가 그런걸 믿지? 내게 마음이란게 남아있긴할까? 이젠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어. 순수한 마음은 진작에 묻어버렸다고. 아직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면, 어서 꿈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봐. 어느 누구도 내 가슴을 뛰게하지 않는걸. 만약 누군가 내게 아직 마음이란게 남아있다는걸 알려준다면, 난 그녀에게 내 평생을 약속할거야. 진실한 사랑? 그런 후에야 믿어주지......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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