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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두까기 인형에서 영감을 얻어 작성한 글입니다. 원작과 유사한 부분이 발견됐을 때, 표절이라는 오해를 사고싶지않아 미리 고지합니다. 작중 배경은 1860~70년대 생활상을 참고한 가상의 장소입니다. ※
호두까기 인형 Ⅱ
제이슨 피터 토드 X 카산드라 케인 X 데미안 웨인
"그 방은 데미안 도련님이 전에 사용하시던 곳이에요. 며칠 전에 방을 옮기셔서 지금은 비어있으니, 아무도 없었을거예요."
씻는 동안 인기척을 느꼈다며 불안해하는 카산드라에게 하녀 하나가 공손히 답했다. 짧은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빗어 말리는 아이 한명, 또 벗은 가슴을 가리고 있던 카산드라의 손을 조심히 끌어당겨 손톱을 다듬는 아이 한명, 카산드라의 몸 구석구석에 향유를 부드럽게 바르는 아이 한명까지 도합 세명이 그녀에게 달라붙어있었다. 카산드라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들의 손길을 잠자코 버티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제이슨의 머리까지 감겨주고 나오자, 그들 앞에는 보드라운 가운 두개가 놓여있었다. 막 가운을 걸친 찰나 그들을 안내한 집사가 돌아왔고, 카산드라는 제이슨과 떨어져 앞으로 그녀가 지내게 될 방으로 오게 됐다.
방은 넓고 화사했다. 하얀 실크가 요정의 날개처럼 늘어져있는 커다란 침대와 장미넝쿨이 어지러이 새겨진 옷장, 온갖 장신구들이 갖춰져있는 장식장과 보석함들 외에도 카산드라를 놀라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한 방이었다. 방으로 안내를 받기 전까지, 그녀는 알프레드와 둘이 웨인의 저택이 아닌 곳에서 살게 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제이슨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에는 마음이 놓였지만, 이토록 넓은 방을 혼자 쓴다고 생각하니 카산드라는 벌써부터 외로워졌다.
"아가씨."
"..."
"카산드라 아가씨."
"...아..."
"이쪽으로-"
아가씨. 웨인의 양녀가 아닌 내게 왜 아가씨라고 부르는걸까. 알프레드의 위치가 그 정도인걸까. 카산드라는 두 팔을 교차해 제 어깨를 가볍게 감싸안고는 옷장 옆에 놓인 전신거울 앞으로 가 섰다. 거울 속 그녀는 조금 달라져있었다. 피부는 은은하게 빛났고, 머리칼은 전에 없이 부드러웠다. 제이슨이 좋아할까? ...알아보긴 할까?
하녀 둘이 새하얀 속치마와 리본이 잔뜩 달린 속옷을 입혀주는 동안 카산드라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명한 무용수의 아내로 손색이 없을지, 웨인 가의 명성과 재력을 아직은 잘 모르지만, 이런 거대한 저택과 수많은 하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가문의 며느리로 모자람이 없을지 스스로를 재고있었다.
카산드라의 속치마 위에 강철사를 휘어 만든 *버슬 패드를 묶고, 진녹색 새틴 드레스를 입힌 하녀 하나가 치마의 뒷주름을 잡아 리본 코사지를 다는 동안, 다른 아이가 작은 발돋움판에 올라가 카산드라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 묶었다. 몇가닥 흘러내린 머리칼이 안 그래도 작은 그녀의 얼굴을 더 갸름해 보이게 한다. 작은 녹색 깃털이 달린 에메랄드 팬던트를 회색 리본에 핀으로 고정시켜 정수리부터 귀 옆, 묶인 머리를 감싸 리본 매듭을 지은 아이는 곧장 카산드라의 귓볼에 작은 녹색 귀찌를 채웠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네."
"말 편히 하세요, 아가씨."
"..."
"다른 분들 앞에서도 그러시면 저희가 경을 친답니다."
내내 거울에만 시선을 두고있던 카산드라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워져 옆의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무리봐도 제 또래 밖에 안되어보였다. 무엇이 너와 나를 구분짓는걸까.
군데군데 금실로 스티치가 되어있는 진회색 구두를 신기고, 헤어핀과 세트인 듯한 에메랄드 반지를 끼워준 후에야 세명의 하녀가 카산드라에게서 떨어졌다. 그녀가 거울 속 제 모습에 복잡한 심경으로 굳어있는 사이, 노크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들어오세요."
멀끔히 차려입은 제이슨의 모습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카산드라는 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게 부끄러워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푸핫, 가볍게 웃는 소리가 낯익어 고개를 들었다. 누구도 제이슨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제이슨은 웃거나 울 때에도 거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 가볍게 공기를 뱉는 것 같은 제이슨의 웃음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서도 몇명 되지 않았다.
깃이 빳빳하게 선 셔츠와 희미한 격자무늬의 베스트, 같은 톤의 자켓은 그를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카산드라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높은 이상과 화려한 꿈, 태생적으로 흐르던 귀태같은 것들이 그를 더욱 '웨인'답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화려하고 좋은 것들을 걸치고서도 자꾸만 움츠러드는 저와는 달리 제이슨은 드디어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빛나고있다. 어쩌면 제이슨은...자신과는 출신이 다른 아이이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사이 제이슨은 가볍게 카산드라를 끌어안았다.
"...멋있다, 제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이토록 해맑게 웃는 얼굴을 요 근래에는 본 적 없었는데. 안고있던 팔을 풀고, 카산드라에게 돌아보라는 제스쳐를 취한 제이슨은 다시 그녀를 당겨 안았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여태 작은 골방에 앉혀놓고 꺼내 줄 생각 한번 하지 않은 저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값비싼 옷을 걸쳐서, 빛나는 보석을 달아서 예뻐보이는게 아니었다. 작고 우중충한 마을에서의 카산드라는 사람이라기보단 잘 만든 인형같았다. 요리도 잘하고, 손재주도 좋고, 뭐든지 알아서 척척 해내는 인형. 지금은 다르다. 제이슨의 눈에 카산드라는 지금 모습이 훨씬 사람다웠다. 의지할 데라곤 그밖에 없는 듯 구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 내가 도와줄게.
몇해 전, 카산드라가 말을 걸어주었던 날을 떠올리며 제이슨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제게 내밀어졌던 손. 그 날 제이슨은 무리하게 점프하려다 넘어져 발등이 반쯤 부어오른 상태였고, 그런 그에게 기어보라며 손가락질을 하던 무리를 헤치고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네가 손을 내밀어준 그 날부터, 난 평생 네 손만을 잡겠다고 다짐했어.
몸을 섞거나, 끌어안고 잠에 들 때, 춤을 보고 난 후, 식사하기 전, 다쳤을 때. 모든 순간에 카산드라는 제이슨의 얼굴을 차고 단단한 손으로 감싸주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카산드라의 서늘한 손은 동시에 그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카산드라가 손을 뻗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만이 그녀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너에게 평생을 함께 해줄 수 있겠냐고 백번이고 천번이고 물을텐데.
"다이닝룸으로 가실 시간이에요."
문가에 서 있던 하녀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아이가 문을 열었다. 카산드라는 자연스레 제이슨의 팔을 잡았고, 제이슨은 열린 문을 돌아보고 저택의 주인을 만날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높은 굽이 어색해 걷기 불편해하는 카산드라와 그녀를 잡아주며 연신 웃는 제이슨을 보고선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은 하녀 아이들은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
"따로 가셔야합니다."
"...왜죠?"
"남자들이 먼저 자리에 다 앉은 후에야 들어가실 수 있어요, 아가씨는."
카산드라는 제이슨에게 무어라 설명해야할까 고심하다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이제 그는 귀족의 성씨를 쓰며 그들의 규칙과 예법을 배우고 지켜야하는 사람이니까. 제이슨의 팔을 잡았던 손을 놓고 책상으로 걸어가 잉크병에 꽂혀있던 깃펜을 집어든 카산드라는 글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다시 보게 되어서 좋구나, 제이슨."
제이슨은 고개를 숙여보이곤 브루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브루스의 말대로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알프레드와 그의 아이들이 도심으로 오기 전, 브루스는 그들의 마을을 찾았다. 알프레드는 살던 집을 처리하는 문제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카산드라는 양털을 깎는 일에 손을 보태기 위해 윗마을로 나가있던 날이었다. 바트의 가게를 관둔 제이슨은 카산드라의 다락방에서 턴 연습을 하다 길가에 세워진 검은 마차를 발견하고 밖으로 나갔다.
눈은 그쳤지만 날은 맑아질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어두웠다. 제이슨은 알프레드의 장화를 꿰어신고 발목까지 쌓인 눈을 뽀드득, 밟으며 마차 앞에까지 가 섰다.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내부에서 제법 따뜻한 공기가 새어나온다. 와인색 벨벳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의 행색은 근처 마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제이슨은 단박에 그가 웨인임을 알아차렸다.
- 제이슨.
- ...
- 난 브루스 웨인이란다. 일단 올라오겠니? 얘기를 나누고싶은데.
브루스는 제이슨을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발음해주었다. 그의 입모양은 알프레드나 카산드라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고급스러운 단어를 쓰고, 정확한 발음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이슨은 마차에 올랐고, 그들은 이웃 마을의 작은 찻집에 도착했다.
잔꽃무늬가 빼곡히 프린팅된 벽지와 부드러운 카페트를 부지런히 눈에 담는 제이슨을 가만 바라보고만 있던 브루스는 점원에게 펜과 종이를 부탁했다. 잠시 후 그들 앞에는 따뜻한 향이 피어오르는 차와 케잌, 쿠키 등이 서빙되었다. 제이슨은 곧장 카산드라를 떠올렸다. 커피보다 차를 더 좋아하고, 마시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위해 우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자신의 곁에 앉아 케잌을 한 입 한 입 맛보는 카산드라의 모습을 그려내는 사이, 브루스는 종이를 제이슨 앞으로 밀어주었다.
[ 네 병은 고칠 수 없단다. 지금의 의료기술로는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어. ]
[ 그럴 줄 알았어요. ]
[ 하지만 유능한 의사와 선생이 네게 말하는 법과 수화를 가르쳐줄거야. 네 목소리를 너는 들을 수 없겠지만, 대신 춤을 추는 네 모습을 네가 볼 수는 있게되지. ]
[ 제게 그들을 붙여주실 건가요? 발레를 배울 수 있게끔 도와주시구요? ]
[ 물론. ]
[ 제게 호의를 베푸시는 이유가 뭐죠? ]
한참 두 사람 사이를 오가던 종이는 브루스 앞에서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제이슨의 이글거리는 푸른 눈을 피하지 않고 차를 즐겼다. 젊은 억만장자의 움직임은 어느 한 군데 우아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제이슨은 그가 대답할 때까지 버틸 작정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 될 수 있는 한 많은 고아들을 돕고싶다. 알프레드에게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나도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었어. 비참하고 외로웠지. 모두가 내게 고아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어. 차라리 얼마 살지 않은 내 목숨을 앗아가시지, 어째서 두 분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거둬가셨는가 세상과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내게 남은 건 막대한 부와 웨인이라는 성 뿐이야. 사실 지금도 그것뿐이지만... ]
거기까지 쓰고 브루스는 잠시 손을 멈췄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하던 그의 표정이 제이슨은 아직도 생생했다. 테이블 위에서 낮게 일렁이는 수많은 촛불들 사이로 처음 보는 얼굴이 걸린다. 브루스의 손을 놓은 제이슨은 의자에 앉으며 브루스를 쏙 빼닮은 소년을 응시했다.
"이 아이가 데미안 웨인이란다."
"..."
"데미안. 앞으로 네 형제가 될 제이슨 웨인,"
"제이슨, 피터, 토드."
달그락. 제이슨 앞에 에피타이저를 내오던 하인 아이의 손이 미끄러졌다. 포크와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적막한 식사 테이블에 울린다. 브루스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하얀 얼굴에 작은 미소를 떠올리며 영악한 표정을 지었고, 제이슨은 주먹을 쥐었다. 당황한 하인 아이가 서둘러 자리를 뜨자 데미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정식으로 웨인 가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제이슨 피터 토드, 가 맞죠. 아버지."
"입양 절차가 끝나면 정식으로 제이슨 웨인이라 불러주셔야 합니다, 데미안."
막 룸으로 들어서던 알프레드가 사람 좋은 인상을 지으며 제이슨과 브루스 사이에 앉았다. 데미안은 하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릎에 덮고있던 냅킨을 구겨 쥐었다. 알프레드는 제이슨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렸고, 제이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프레드는 말을 하지 않고도 사람을 위로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제이슨은 데미안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신경쓰며 물잔을 쥐었다. 투명하고 얇은 글라스에 채워진 샴페인을 들이켜고 싶었지만, 다이닝룸으로 내려오기 전, 카산드라가 적어준 '준수해야 할 몇가지 예법들'에는 식사 자리에서 주류를 벌컥, 들이마시는 것은 금지되어있었다.
"캐스, 아주...잘 어울리는구나."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여닫는 문 없이 아치형의 단단한 나무 틀을 입구로 삼는 듯, 하녀 하나가 카산드라를 그리로 안내했다. 알프레드의 진심어린 칭찬에 카산드라의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다. 제이슨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는 곧 환히 웃었다. 내가 제일 먼저 본 예쁜 너. 데미안은 제이슨의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너희 둘은 서로를 그토록 사랑스럽게 바라보는거지? 가진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반갑군요, 케인 양."
"..."
"브루스 웨인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미는 브루스에게 치맛자락을 살짝 쥐고 상체를 숙인 카산드라는 제게 닿는 낯선 시선에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브루스는 데미안을 돌아보고는 나지막히 한숨을 뱉었다. 이들을 데려오기로 결정하고 난 후부터 데미안은 계속 브루스에게 공격적이었다. 선뜻 받아들일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제이슨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카산드라를 내보내야하나 잠깐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케인 양에게는 좀 낫군. 제이슨에게는 시선 한 번 준 적 없는데. 브루스의 짐작대로 데미안은 제이슨이 식사를 하러 온 순간부터 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카산드라에게는 끈질긴 시선이 이어졌다. 그녀가 자리를 찾아 그의 곁에 앉을 때까지.
카산드라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제이슨에게 눈짓을 했다. 표정이 안좋아보였고, 그녀의 직감으로 브루스의 아들인 데미안 탓인 것 같아서였다. 제이슨은 카산드라에게 웃어주며 시야에 걸리는 데미안을 무시하기 위해 애를 썼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니 좋군요. 다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은 드물겠지만, 종종 모일 수 있도록 노력하죠."
"진작 그러시지..."
"...케인 양은 사흘 뒤부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따로 배우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로디에게 편하게 말하고,"
"연산이나 할 줄 아는지..."
"...알프레드. 제이슨. 시립 발레단의 단장이 수일 내로 방문해 제이슨의 실력을 평가해줄 겁니다. 당분간은 제이슨의 치료와 발성연습에 치중하고,"
"쟤가 춤을 춘다구요? 발레를? 귀머거리가 무슨 발레를...!"
쨍그랑-! 브루스가 언짢은 표정으로 데미안을 제지하려는 찰나 카산드라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컵이 떨어졌다. 실수로 놓쳤다기보단 부러 떨어트린 기색이 강했다. 알프레드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고, 데미안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카산드라를 노려봤다. 브루스와 제이슨만이 평온한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무례하군요."
"너...!"
"너무 무례해서 손이 떨리는 바람에."
"..."
"차라리 듣지 못하는게 나을 때도 있네요."
"아버지!"
"명문있는 가문의 자제들은 예절과 대인관계에 관한 정식 교육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군요. 사용하는 말들이 천하고, 웃어른에게 상당히 버릇 없이 구네요."
"..."
"제이슨과 달리."
조용히 음식을 준비하던 셰프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난로 속 장작이 타는 소리, 주스 안 얼음이 녹아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리는 틈 사이로 제이슨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푸핫, 가벼운 그의 웃음 위로 브루스의 웃음이 겹친다. 데미안은 저를 도와줄 생각은 않고 그저 웃기만 하는 브루스를 노려보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알프레드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가버렸다.
카산드라는 떨리는 손을 감추며 제이슨을 쳐다보았고, 제이슨은 잘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프레드는 난감한 표정으로 와인잔을 들었지만, 브루스는 여전히 통쾌한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가씨."
"음..."
"캐스 아가씨, 아침 드실 시간이에요."
카산드라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 또래로 보였던 하녀 아이 한명에게 수시로 카산드라를 돌보라는 브루스의 말이 있었고, 아이의 이름은 로지였다. 로지의 손길에 반사적으로 몸을 피한 카산드라는 한숨을 뱉으며 손을 뻗었다. 이번엔 로지가 카산드라의 차가운 손에 흠칫 떨었다.
"미안해요. 할아버지나 제이슨이 아닌 사람이 깨우는게 익숙하지 않아서..."
"미리 말씀해주셨는데도 제가 실수했는걸요. 죄송해요."
이틀째 반복되는 아침이었다. 카산드라는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욕실로 들어갔고, 로지는 카산드라가 입을 옷을 고르느라 옷장 안에 들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똑똑-
급한 노크인걸 보니 로디 아니면 데미안 도련님이겠네. 로지는 문을 열고,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카산드라가 씻고 있는 관계로 누구도 방에 들일 수는 없었다. 문 앞에는 데미안이 잠에서 덜 깬 뾰루퉁한 표정으로 큰 상자를 안고 서 있었다. 문을 닫고 나와 선 로지는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얼른 상자를 받아들었다.
"케인 양한테 줘."
"네."
"내가 줬다고 꼭 말해."
"...네."
할 말을 끝내고도 데미안은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혹시 카산드라가 제 목소리를 듣고 나와보진 않을까 싶어서. 로지의 의아한 눈빛에 씨이- 하며 돌아선 데미안은 슬리퍼를 끌며 돌아갔고, 로지는 카산드라의 방으로 돌아와 낮은 테이블 위에서 상자 위에 묶인 리본을 끌렀다. 저택으로 배달되어 오는 모든 물건은 하수인들이 먼저 확인하도록 되어있다. 누구의 몸종이든 간에 확인할 수 있는 자가 먼저 확인하는게 규칙이었다. 데미안이 카산드라를 해칠거라고 의심하는건 아니지만 자신이 먼저 열어봐야한다고 판단한 로지는 상자를 열고는 낮게 감탄을 뱉었다.
검은 새틴 리본으로 허리를 두르는 새하얀 프릴 드레스와 소매깃, 앞섶을 마찬가지로 검은 리본으로 덧댄 하얀 싸개 단추가 조로록 달린 재킷이 곱게 접혀 들어있었다. 진주 귀걸이와 모자도 함께 있었다. 짙은 푸른색의 벨벳천을 접어 만든 장미꽃이 무더기로 얹힌 검은 모자를 빙 돌려보던 로지는 뭐예요? 하며 묻는 카산드라에게 얼른 다가갔다. 물기가 떨어지는 검은 머리를 타올로 감싸며 로지는 생글생글 웃었다.
"데미안 도련님이 선물을 주셨어요. 직접 방 앞으로 오셔서."
"...선물?"
"화해하자는 뜻이 아닐까요- 며칠 전 식사 자리에서 무례하게 군 것을 사과하는."
"..."
"오늘은 저걸로 입으실래요?"
***
"로디. 로디가 로지의 오빠래. 첫 날, 우리를 안내한 그 사람이 날 보살펴주는 아이의 오빠래."
"..."
"너도 놀랐구나. 나도 듣고 많이 놀랐어. 인상이 전혀 다르지?"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고, 데미안은 생각했다. 세 사람은 본채의 다이닝 룸이 아닌 그들이 지내는 방들이 있는 별채의 다이닝 룸에 모여 앉았다. 본채의 것보다는 작은 룸의 분홍빛 테이블보를 뒤짚어 씌워놓은 테이블 앞에 털썩, 앉은 데미안은 먼저 와 있던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려다 입을 다물었다. 첫번째 이유는 카산드라가 제 선물을 입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과 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아서다.
카산드라가 제이슨과 대화하는 모습이, 마치 그녀가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데미안은 우유를 삼키다시피 마시면서도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먼저 데미안의 기척을 알아차린 제이슨이 어색하게 데미안에게 눈짓을 해보이자, 카산드라도 고개를 돌려 제이슨의 어린 동생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제게로 쏠린 시선에 사레가 들렸는지 하얀 자국을 윗입술에 남긴 채로 콜록거리는 데미안에게 카산드라가 냅킨을 내밀었다.
"선물은 고마워요."
"콜록-콜록-"
"제이슨에게는 사과 안하실건가요?"
"...그건...콜록-..."
"도련님에겐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형제가 생겼다는 일이 수치스러운 일인가요?"
"..."
"아무것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도련님을 동생으로 두게 된 제이슨도 수치스러울 거예요."
제이슨에게는 고개를 돌린 채로 빠르게 말을 뱉어낸 카산드라는 앞에 놓인 접시에 묵묵히 집중하기 시작했고, 제이슨은 팬케이크를 조각내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데미안이 붉어진 얼굴로 다이닝 룸을 나가버리자, 제이슨은 카산드라를 쳐다봤고, 카산드라는 어렴풋 웃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이 내게 선물을 줬어."
"..."
"예쁜 옷이야. 꽃이 잔뜩 올라가있는 모자도 있어."
"..."
"난...그런 예쁘고 비싼 옷이 아직 부담스러워."
"..."
"나중에 보여줄게, 제이슨."
제이슨은 카산드라의 얼굴에 서린 슬픔을 읽었다. 떠나온 마을에 대한 그리움, 낯선 곳에 쉽게 적응하는 제이슨과 달리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안쓰러움, 데미안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제이슨에 대한 착잡한 마음과 데미안을 향하는 분노...온갖 것들이 섞여 심란한게 분명했다.
"도련님. 상태를 봐주실 박사님이 본채에서 주인님과 함께 기다리십니다."
카산드라를 달래줄 심산으로 손을 뻗던 제이슨은 억지로 일어나 카산드라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가기 싫은 모양이네. 카산드라는 손을 흔들었다. 다이닝룸의 유일한 창문으로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로 향하는 제이슨의 모습이 보였다. 제이슨이 카산드라에게 브루스와 마을에서 만났던 일을 말해준 적이 없어서 그녀는 그가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꼭 나아서 발레를 배울 수 있기를, 유명한 무용수가 되기를 바라며 한참을 창문 앞에서 서성이는 카산드라의 뒷모습을 데미안이 삐딱하게 서서 보고있다 돌아섰다.
***
"청신경이 망가진 발레 무용수라니, 특이하고 대단하군요."
"일전에 박사님의 회중시계를 고쳐준 알프레드 씨의 가족같은 아이입니다. 이제 곧 제 양자로 정식 입양되기도 하고, 시립 발레단에도 입단시킬 예정입니다. 알프레드에게 어린 양녀가 있는데, 그 아이의 연주에는 정확하게 맞춰 발레를 한다는군요."
"호오..."
"박사와 몇명의 치료진이 이 아이에게 말하는 법을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혹시나 청각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도 계속 연구해주시고...가능하다면 음악에 박자를 맞추는 법도..."
"큰 아드님을 많이 아끼시는가 봅니다, 웨인."
제이슨은 몇가지 문항에 체크를 하며 그들의 대화를 주시했다. 박사는 깔끔하고 푸근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럼 아드님을 연구소에서 며칠 지낼 수 있게 해주시죠. 가능한 모든 검사를 해본 후에 계획을 세워보죠."
"수일 내로 단장이 오기로 했습니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돌려보내주셔야 합니다."
"나흘 정도면 끝날 겁니다. 오늘 오후에 저희 직원을 보내 모시도록하죠."
데려가? 돌려보내? 불안한 표정으로 검사지와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제이슨의 머리를 브루스가 쓰다듬었다. 열다섯이 되도록 성인 남성에게서 머리가 쓰다듬어진 적이 없는 제이슨은 놀라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아, 미안하다. 익숙하지 않은가 보구나."
"..."
"며칠동안 박사님의 연구소에서 검사를 받게 될거야."
"..."
"데미안과 케인 양에게 인사하고, 짐을 챙기려무나."
...머뭇거리는 제이슨에게 박사가 손을 내밀었다. 잔주름이 많은 분홍빛 손바닥을 보니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제이슨은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잘 부탁합니다, 핸썸한 무용수."
***
"제이슨 도련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듣지 못하셨대요?"
"어렸을 적엔 소리를 들었던 모양인데, 큰 소리에는 머리가 아팠었다고 했어요."
"후천적인거였구나...입모양을 보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는건, 아가씨가 도와주신거예요?"
"...오랜 시간 싸웠죠."
"아가씨는 좋은 교사네요."
가볍게 땋아 말은 카산드라의 검은 머리칼 군데군데에 실핀을 꽂아 고정한 로지는 검은 나들이 모자를 씌어주고 뒤로 물러섰다. 화장대의 거울 안으로 비치는 카산드라는 눈부시게 예뻤다. 누군가 거울 위로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은 모양에 로지는 환히 웃으며 서랍장으로 장갑과 구두를 찾으러 몸을 돌렸고, 카산드라는 푹신한 연분홍색 쿠션을 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 앞으로 간 그녀는 가죽으로 만든 붓케이스와 둘둘 만 종이 몇장을 작은 손가방에 챙기고, 거울 앞으로 가 섰다. 방을 나서기 전 옷매무새를 정돈하는게 버릇이 되었다.
"데미안 도련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제이슨이 검사를 위해 방을 비운지 사흘째였다. 사흘하고, 반나절. 그동안 데미안은 틈만 나면 카산드라 앞에서 얼쩡거렸다. 벽난로가 있는 리빙룸에서 책을 읽고있는 카산드라 앞에서 로디와 함께 체스판을 펼쳤다가 성질을 부리며 말들을 죄다 넘어뜨려버리는가 하면, 아침을 먹을 땐 꼭 시리얼을 하나씩 골라 으드득, 씹어 먹었다. 또 그녀가 로지와 산책을 하는 동안엔 브루스의 강아지 - 실상 셰퍼드 수준으로 컸지만 브루스는 꿋꿋이 퍼피라 불렀다. - 와 함께 카산드라의 앞으로 우다다 뛰어다니다 넘어져 퍼피에게 등을 밟히기도 했다.
- 관심이 필요할 나이죠.
데미안과 친하게 지낼 생각이 있냐는 알프레드의 물음에 카산드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제이슨에게 진정으로 사과를 하고, 그를 인정해주기 전까지는 절대 데미안과 친해질 생각이 없었다.
오늘 데미안이 선물해준 나들이 옷을 입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온실에서 드로잉 수업을 하겠다는 괴짜같은 여교사 때문에 나들이 옷을 입어야했다. 그런데 별안간 런드리 룸에서 카산드라의 나들이 옷을 죄다 세탁해버렸고, 카산드라가 이곳에 오기 전 브루스가 준비해둔 그녀의 옷은 실내용 드레스와 연회용 드레스, 잠옷으로 입는 가벼운 원피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나들이 옷은 데미안이 선물해준 화이트 드레스였다. 난처해하는 런드리 룸 메이드가 로디에게 혼나는걸 바라지는 않아, 카산드라는 하는 수 없이 화이트 드레스와 자켓을 걸쳤다.
"잘 어울리네. 미스 케인."
장난치는 투로 툭, 뱉고 앞서가는 데미안의 뒤통수를 잠시 노려보던 카산드라는 온실로 들어가기 전, 저택의 입구를 잠시 쳐다보았다. 당장이고 제이슨이 달려와 그녀를 안아줄 것 같았다. 푸드덕, 작은 참새만이 바쁘게 오가는 것을 바라보던 카산드라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온실로 들어섰다.
"이토록 무심하고 차가운 식물의 꽃말이 뭔지 알아?"
"..."
"정열, 열정, 불타는 마음...꼭 너같아."
"무슨 뜻이죠?"
"그와 무슨 사이야? 네 피앙세야? 아님 단순 섹스 파트너?"
"말이 지나치네요, 데미안."
"저택에 온 첫 날, 내가 쓰던 욕실에서 그 자식이랑 잤잖아?"
"...당신이었구나. 멍청하게 훔쳐보던 인간이."
카산드라 앞으로 성큼 다가간 데미안은 저와 키가 비슷한 그녀를 노려보다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입술을 부딪혔다. 그 탓에 모자가 벗겨졌고, 카산드라는 저항하려다 두 팔을 늘어트렸다. 반응해주지 않는게 가장 효과적임을 본능적으로 알고있었다.
***
"고생하셨습니다. 예정보다 검사가 빨리 끝난건 도련님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신 덕이에요."
"..."
"조심히 들어가세요. 결과는 나오는 대로 자택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제이슨은 짐가방을 들고 웨인 저택의 입구를 지나쳤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게 되어 아직 아무도 그가 온 것을 모르는 듯 했다. 카산드라를 놀래켜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새어나온다. 번화가를 지나는 동안 카산드라에게 줄 선물도 준비했다. 지난 날, 데미안이 그녀에게 나들이 옷을 선물한게 내심 걸렸던 모양으로, 제이슨은 부티크에서 라피스라줄리가 실버 팬던트에 세공된 네크리스를 구매했다. 연구소로 가기 전, 용돈을 챙겨준 브루스가 고마웠다.
목걸이가 담긴 흰색 보석함을 소중히 쥐고 온실을 막 지나치던 제이슨의 걸음이 문득 멈춘다. 숨이 멎는 듯한 통증이 그의 가슴과 머리를 후려쳤다. 온실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 보였던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데미안과 카산드라의 옆얼굴이었다. 보석함과 짐가방을 놓친 제이슨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가씨! 오늘 제이슨 도련님이 오신...어머나..."
본채에서 뛰어나오던 로지가 우뚝 멈춰서며 입을 가렸다. 로지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 데미안을 밀쳐낸 카산드라는 온실을 뛰쳐나오다, 로지보다 제이슨을 먼저 발견했다. 상처받은 얼굴,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다리, 발치에 부서져 있는 보석함, 옷가지를 반쯤 엎지른 짐가방을 본 카산드라는 제이슨에게 다가갔고, 그는 그녀의 손이 제 얼굴에 닿기 전에 별채를 향해 뛰었다.
무너지듯 주저앉은 카산드라는 부서진 보석함 사이에서 빛나고 있는 목걸이를 주워들었다. 금빛 실선이 섞인 새파란 보석. 보석이 박혀있는 은빛 팬던트는 사진을 넣을 수 있는 로켓 형식이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달칵, 팬던트를 연 카산드라는 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 작은 다락방에 앉아있는 카산드라와 그녀의 뒤에서 환히 웃고있는 제이슨을, 알프레드가 찍어준 사진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
"..."
책상에 걸터앉아있는 제이슨을 문틈으로 확인한 카산드라는 그의 짐가방을 끌어안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는 동안 제이슨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였다. 천천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침대 위에 짐가방을 내려놓고,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제이슨에게 다가갔다. 멍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상처받은 얼굴로 내려앉는다. 카산드라가 손을 뻗는 것을 바라보던 제이슨은 그녀의 손을 쳐냈다.
네가 손을 내밀어준 그 날부터, 난 평생 네 손만을 잡겠다고 다짐했어. 그런데 넌...? 넌 누구에게나 손을 뻗는구나.
"...미안해, 제이슨."
"..."
"변명 같겠지만,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제이슨은 우악스럽게 달려들어 카산드라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치맛단이 찢어져 속치마가 드러났고, 높게 세운 목깃이 무너져 쇄골이 보였다.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끊어져 바닥에 뒹굴자 제이슨은 그걸 짓밟아 부숴버렸다. 그리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듯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다, 펜을 찾아들고 종이에 휘갈기듯 하고싶은 말을 써내렸다.
[ 넌 그가 사준 옷을 입고, 그와 함께 있었어. 그리고 그를 밀어내지 않았고. ]
옷깃을 여미며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카산드라에게 종이를 집어던진 제이슨은 욕실로 들어가버렸고, 문을 잠그는 소리가 울렸다. 카산드라는 처참히 조각난 목걸이의 파편을 모아 쥐고 선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
"아가씨."
"..."
"제이슨 도련님이 곧 떠나신대요. 지금 현관에 다들 모여있답니다."
제이슨은 철저히 카산드라를 피했다. 아무리 넓은 저택이라해도 한번은 마주칠 법도 한데, 카산드라는 제이슨의 뒷통수 한번 보지 못한 채로 며칠을 보내야했다. 열흘 정도 되었을까, 얼마 전 다녀간 시립 발레단의 단장이 제이슨을 합숙소로 데려가고싶다는 의사를 브루스와 알프레드에게 전했다는 말을 로지가 카산드라에게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난 오늘, 힘없이 창가에 기대 서 있는 카산드라를 로지가 나지막이 불렀다.
[ 넌 그가 사준 옷을 입고, 그와 함께 있었어. 그리고 그를 밀어내지 않았고. ]
카산드라는 욱신거리는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억눌렀다. 오른손에 났던 상처는 많이 아물어 이제 딱지조차 남지 않았다. 겨우 다리를 끌어 다이닝룸으로 향한 카산드라는 수척해진 얼굴로 창 밖을 내려다봤다. 두터운 외투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 쓴 제이슨이 그의 하수인 한명과 함께 눈밭을 걸어나가고 있다. 한번쯤은 돌아봐주지 않을까. 카산드라는 이를 악물고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미 부르튼 입술과 부은 두 눈이 쓰라렸지만, 울고싶지 않았다. 제이슨은 돌아올테고, 시간이 지나면 오해가 풀릴거야.
제이슨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고, 카산드라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그 곳에 붙박인듯, 한동안 서 있었다. 예전 제이슨이 출근하는 길을 오래 바라봐주던 날처럼.
END
※ 제이슨과 카산드라의 사랑과 결혼을 위한 여정은 호두까기 인형 Ⅲ 편에서 계속됩니다...이만 총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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