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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ouchable 1부
제이슨 토드 X 카산드라 케인
포탄이 눈 앞에 떨어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잊을 수 없는 많은 순간들 중, 가장 오래도록 그를 괴롭히는 장면.
제이슨은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저만치 밀어내고 상체를 일으켜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어깨와 가슴, 배를 둘러 깨끗한 붕대가 칭칭 감겨있다. 윽, 낮은 신음을 뱉으며 자세를 고쳐앉은 그의 앞으로 낯선 풍경이 살아난다. 반쯤 열린 문 밖으로는 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의 구둣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한데, 방 안은 지나치게 고요해 동떨어진 느낌이 난다. 군데군데 일어난 나무바닥 위로 얇은 햇살이 비쳐드는걸 보니 낮인듯 싶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날을 추측할만한 어떤 것도 곁에 없었다.
오른편으로 쏟아지는 빛에 고개를 돌리니 반듯하게 짜인 창문 받침 위에 작은 유리병 하나가 놓여있다. 지저분한 상처로 뒤덮인 손으로 집어들자, 달각, 조개껍질이 유리와 부딪혀 경쾌한 소리를 낸다. 그의 고향은 사방 어디서든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옆집 아저씨의 잠꼬대, 마을 꽃집 아주머니의 자식 걱정, 어부 할아버지의 인생 한탄을 하루종일 들으며 자라던 그의 평화로운 세상이 무참히 깨어진건 겨우 네 해 전이었다.
막 열여섯을 넘긴 제이슨은 생전 만져본 적도 없는, 제 팔뚝만한 총을 쥐고 낯선 이들을 죽여야했다. 무릎이 뚫리거나, 두 눈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리는 것, 어깨가 흉하게 부러지는 꼴을 적에게서 보는 일은 차라리 나았다. 2주간이나 함께 지냈던 제 또래가 머리 한가운데에 총을 맞고 고통스럽게 악을 쓰는 것을 본 후로 그는 몇달을 내리 잠에 들지 못했다. 그 아이의 가족이 걱정되어서? 그 아이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아니, 저 자신도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까봐. 그는 그게 가장 두렵고 무서웠다. 작고 반짝이는 총알 하나에 누군가의 세상이 순식간에 무너지는게 무서웠다.
곧 불면증은 사라졌고, 그는 먹먹한 귀를 손바닥으로 몇번 두드리며 밥을 퍼먹는 일에 익숙해졌다. 아침을 맞게 되면, 오늘도 살아있구나, 살아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짧은 머리에 비누를 벅벅 문질렀고, 다시 또 잠을 청할 시간이 오면, 무사히 견뎠구나, 견뎌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민가에서 몰래 훔쳐온 빵을 숨죽이며 뜯어먹었다. 또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선 배급되는 식사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4년 째가 된 해에 그는 특수부대 소속이 되었고, 주로 게릴라 작전에 투입되거나 스파이로 적군에 숨어드는 일을 했다. 주름 잡힌 군복, 제법 태가 나는 사복과 깔끔한 배식만으로도 특수부대원들의 사기는 일반 병사일 때와 천지차이로 높아졌다. 제이슨은 훈련에 가장 열심히 참여했고, 물론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달리 특혜는 없었다. 그가 힘을 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여태 버텨왔으니까. 또 하루를 살아낼 것이고, 내일 밤 이 침낭에 누워 변함없는 생각을 할 수 있기를.
그런 그의 눈 앞에서 또 한명의 친우가 죽었다. 그의 흩어진 시신을 직접 수거해오는 길에 제이슨은 4년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닦아도 닦아도 더러운 것은 지워지지 않는데, 무엇을 지우자고 계속해 흐르는가. 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적진을 휘젓는건 위험했다. 그런 무모한 짓을 스스로 저질렀다는게 지금까지도 의심스럽지만, 본인의 의지로 뛰어들었다. 그는 흉부와 왼쪽 어깨에 심한 자상을 입었고, 의식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울창한 숲이었다. 그의 고향에선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빽빽하게 모여 자란 하얗고 마른 나무 기둥.
"일어나셨네요?"
"......"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 움직이면 안되는데."
작은 은색 트레이에 주사기와 붕대, 알콜솜을 담아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온 이는 나이 지긋한 여성이었다. 팔에 감긴 완장으로 봐선 간호원같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선 죽어가는 이를 살려내겠다는 사명감보다는 전쟁에 찌든 평범한 아낙의 근심만이 읽힐 뿐이었다.
경계를 풀지 않는 제이슨을 가만 바라보던 여자의 마른 입술 새로 한숨을 흘러나온다. 그녀의 주머니에서 달그락, 제이슨의 군번줄이 나온다.
"토드 군. 민간인에게서 공격받고 숲으로 도망친 모양이더군요. 어린 아이가 당신을 이리로 데려왔어요. 덩치도 작은 애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어린 아이. 숲. 힘...? 제이슨은 여자의 말을 단어로 끊어 들으며 눈을 감았다. 축축한 흙바닥으로 누우며 무엇을 봤더라.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는지 한참을 골몰하던 제이슨은 팔꿈치 안쪽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따끔할거에요. 힘 주지마요."
"...그, 아이..."
"잘 안들려요, 토드 군."
"그 아이."
"...당신을 이리로 데려온?"
고개를 까딱이자 여자의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생명의 은인은 보고싶은가보죠? 간호원의 말에 제이슨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명의 은인. 내 생명을 부지해온 것은 나 스스로인데. 여지껏 누군가 그를 살리려든적 있던가. 다들 죽음 앞으로 등을 떠밀었을 뿐이었다. 그런 자신을 살려준 사람이 있다는게 실감나지 않았다. 적국의 땅 위로 발을 딛은 순간부터 민간인에게서 받을 위협도 감안하고있었다. 근데 민간인에게서, 그것도 작은 어린아이에게 목숨을 빚지다니.
주사바늘을 부러뜨려 트레이에 가볍게 던진 간호원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앓는 소리를 낸다. 제이슨을 힐끗 내려다보는 눈빛에 장난기가 어리더니, 그대로 등을 돌린다.
"만나게 해주는거!"
"......"
"...큼, 아니었습니까?"
1초, 2초, 3초......제이슨은 정적이 돌면 초를 세기 시작하는 버릇이 있다. 30초 정도 지나 간호원이 다시 뒤를 돌아 그를 향해 다가왔다. 제 아들 대하듯 하는 서글서글한 눈빛에 제이슨은 주먹을 쥐었다. 문득 고향에 남아계실 부모님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듯, 알고있다는 듯, 간호원의 갈라진 손바닥이 그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다.
"그 아이는 돌아갔어요."
"어디로...?"
"그들이 사는 곳으로 돌아갔지요. 곧 기억이 돌아오겠지만, 이 마을은 적국에서 버린 곳이잖아요. 버림받은 자들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나요? 듣자하니 집을 버리고 웬 막사같은 곳에서 모여살고 있다더군요."
"......"
"당신네 부대가 할 일이......그들을 흩어지게 하는 거라고 들었어요. 당국으로 귀속될 땅이니, 투항하거나 죽음을 맞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할 거라고......"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모든 기억에 제이슨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는 상부의 명에 자원해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을 살펴보러 갔던 참이었다. 인원은 총 몇이나 되는지, 무기를 소지했는지, 식량은 어느 정도를 어떻게 보관하고있는지 등을 파악해 부대로 복귀하면되는 간단한 임무였다. 민간인들 뿐이라는 생각에 느슨해졌던 탓인지, 아님 막 세상을 떠난 친우에 대한 슬픔 때문인지, 제이슨은 인기척도 느끼지 못해 날카로운 것에 두차례 정도 공격당했고,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숲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하얀 나무줄기, 바싹 마른 검은 잎들,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희미한 빛.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괜찮아요? 간호원의 손길에 정신을 차린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그대로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언가 끔찍한 것을 보고 겪은 기분이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와서인가? 아니, 그런 종류의 공포가 아니었다. 어째서 나무와 잎들의 색이 그저 희고 검었을까. 근 반년간 비 한번 내린 적 없는 땅이라 들었는데, 바닥이 어찌 그리 축축했을까. 어린 아이가 어떻게 저를 데리고 그 곳에서 이 곳까지 올 수 있었을까.
질끈 눈을 감은 제이슨은 떠올리지 않으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다 잊고싶었다. 단꿈같은 휴식이 주어지려는데 그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복잡한 일은 잠시 잊고, 자자. 조개껍질이 든 유리병을 쥔 채로, 제이슨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의 귓가로 파도소리가 울린다. 고향집에서 듣던, 익숙한 자장가가 들려온다......
2주 후.
"헤이."
"...꺼져."
"너무해! 어떻게 들어오자마자 꺼지래!"
"그럼 닥쳐."
"......"
"...뭐."
검지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붙여 입술에 대고 좌우로 움직이는 제스쳐에 제이슨은 진절머리를 쳤다. 틈만 나면 장난질이야, 틈만 나면......읽던 책을 덮어 옆 테이블에 내려놓은 제이슨은 귀찮은 손짓으로 문 앞에 선 남자를 들였다. 반듯하게 주름을 잡은 베이지색 제복 차림의 남자는 얼른 침대 맡으로 다가와 나무 의자에 앉으며 웃었다.
"나쁜 소식이랑 슬픈 소식이 있어."
"...장난하냐?"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뭐가 있겠냐."
"말하고싶은 것부터 말해."
"좋-아. 슬픈 소식부터."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짖궂게 웃던 남자의 인상이 천천히 바뀐다. 얼굴 가득 슬픔이 내려앉기에 제이슨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손을 이불 사이로 숨겼다. 누군가가 또 세상을 뜬 것일까.
"나 딕 그레이슨이 오늘로 다섯번째 차였다."
"......"
"데이지 알지? 이 병원 간호원."
"......"
"아니지, 네가 알면 안되지. 됐다. 슬픈 소식 끝."
......제이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찌푸렸다. 장난쳐서 삐졌나, 전우? 씩 웃으며 팔뚝을 툭, 치는 딕에게는 차가운 표정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안도하는 제이슨이었다. 적어도 특수부대원들만큼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고된 훈련을 해낸 동료들만큼은 더 이상 목숨을 잃지 않기를 지난 2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빌었다.
저 자신말고는 그 어떤 존재도 믿지 않지만, 저 없는 곳에서 동료가 또 죽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제이슨은 아무렇지 않게 손사래를 치고는 팔짱을 꼈다. 딕이 헛소리를 할 때면 그가 취하는 행동이었다. 뭐라 떠들어도 더 이상 귀담아 듣지 않겠다는, 그런 뜻의.
"나쁜 소식은 진짜 나쁜 소식인데."
"얘기하고싶은만큼 떠들고 조용히 나가라."
"...숲 근처에 모여 살고있는 이 마을 사람들 말이야."
"......"
"저들에게 작은 실험이 있었다더라."
"...실험?"
"살인무기를 만들어내려던 거지.."
팔을 풀고 자신을 향해 돌아앉는 제이슨의 태도에 신이 난 딕은 자신이 들은 내용을 술술 늘어놓았다.
"이 마을이 원래 천대받던 곳이였는데, 4년 전 전쟁이 시작되고 몇달 지나지 않아서 고위관료 몇이랑 의료진 몇이 마을로 내려왔대. 처음엔 나라에서 드디어 저들을 인정해주는구나 싶어서 환대했는데, 그들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약물을 주사하기 시작했고, 곧 주사를 맞은 아이들이 다 죽어나가니까 다들 문을 걸어잠그고 버텼다더라. 못 열 문이란 세상에 없으니, 그들은 무력으로 마을 사람들을 제압하고 다시 주사를 놓기 시작했대......근데 한 아이가 멀쩡했더란다. 열다섯이 죽어나갔는데, 그 애 딱 한 명만."
"계속해."
"실험에 박차를 가한거지. 곧 주사를 맞고도 멀쩡한 아이들이 늘어나고, 아이뿐만이 아니라 노인, 여성까지 주사를 맞아야했는데 이상하게도 성인남성들은 면제됐대. 총알받이로 쓸 참이었는지......아무튼 이상을 보이지 않은 첫 아이를 포함해서 총 다섯명이 한달 넘게 살아남자, 그들은 얼마 후에 철수했다고 하더라."
"주사만 놓고 가버렸다고?"
"무슨 주사인지는 나도 몰라. 위에도 파악된 바가 없나봐. 다만 그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돌아온 신참 하나가 늘어놓은 얘기로 추측하고있을 뿐이야. 주사 얘기는 이 병원에 원래 돌고있었고."
"어떤 모습이었는데."
"야, 끔찍해서 말하기가 좀......"
"어떤 모습이었냐고!"
왜 화를 내, 임마......말끝을 흐리며 뒤로 약간 몸을 뺀 딕은 제이슨의 형형한 눈빛에 미간을 좁혔다. 막 부대에 파견된 신참이 바들바들 떨며 횡설수설하던 것을 떠올리는 그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털이 수북한 날카로운 팔과 다리, 코와 입은 없고 그저 눈만 수두룩한 커다란 얼굴, 입이 귀까지 찢어져 피를 뚝뚝 흘리고 다니는 여인과 지나치게 힘이 센 아이. 딕은 머리를 거칠게 털어내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복귀하면 직접 들어. 난 말 못하겠다."
"딕!"
"너 이틀 후에 복귀잖냐. 돌아오면 보자!"
"야, 그레이슨!"
"몸조리 잘해, 친구."
뒷걸음질로 방을 나가버린 딕의 구둣발 소리가 다급히 멀어진다. 방 안이 고요에 잠기자 제이슨은 다시 1초, 2초...초를 세기 시작했다. 수많은 숫자들 틈으로 딕의 굳은 표정과 말소리가 섞여든다. 주사만 놓으면 아이들이 죽어나가서......열다섯이 죽어나갔는데, 그 애 딱 한 명만......한달 넘게 살아있었고......무슨 주사인지는 나도 몰라......
제이슨은 별안간 느껴지는 기척에 홱 고개를 쳐들었다. 창문 틈새로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며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단도를 쥔 그는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위로 밀어올리는 식의 나무문이라 소리가 안 날 수 없었다. 적의 습격을 방어할 수 있기만을 바라며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
창문 밖에 서 있는 이는 적군도, 의료진도 아닌 작은 소녀였다. 검은 귀밑머리와 창백한 얼굴, 여린 어깨를 차근차근 살핀 제이슨은 창문 가로 다가서며 최대한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민간인이라면, 저들끼리 모여산다는 무리에 속한 이라면, 혹 그렇지 않다 해도 안전하게 부대로 보내려면 우선 자신을 믿게 만들어야했다. 소녀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웃는게 익숙지 않아 곧 무안해진 제이슨은 미소를 거두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누군가를 회유하는데에 있어서 그의 능력은 제로였다. 웃는 얼굴이 친절해보일리 만무했다. 이를 어쩌나, 뭐라고 말을 꺼내야하지, 고민하는 사이 소녀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수척한 자신의 모습이 비칠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제이슨은 다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곧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했지만, 손에서 힘을 풀지는 않았다.
아무도 믿지 못할 곳. 자기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믿어선 안되는 곳. 바로 그런 곳이니까......속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어......"
"......"
"여긴 어쩌다...? 길을 잃었어?"
"......"
"이 마을에 살고있어?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당연히 마을에 살고있으니까 여기 있겠지, 멍청아. 속으로 열댓번은 더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제이슨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딕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주사. 그들이 마을 사람 과반수 이상에게 투여한 주사. 저 소녀도 그 주사를 맞았다면? 살아남은 다섯명 중 한명이라면?
제이슨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에 침을 삼키며 재차 물었다. 이 마을에 살고있어? 1초, 2초, 3초......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려는 찰나, 방문이 열렸다. 약을 전하러 온 간호원을 본 소녀는 순식간에 달아났고, 제이슨은 창문틀을 잡고 몸을 넘기려다 옆구리의 통증에 그대로 넘어졌다.
"토드 군! 괜찮아요?!"
"으......"
"무리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이틀 후면 복귀할 수 있다고 해서 몸이 다 나은건 아니에요."
"...그러게요. 아직도 되게 아프네요."
"대체 뭘하고 있었어요? 당신을 이리로 데려온 아이잖아요. 고맙단 인사라도 하려고 쫓아갈 셈이었나요?"
"저 아이가 날 이리로 데려온...그 애란 말입니까?"
"그래요. 당신을 여기까지 용케 데려온 애를 어떻게 잊겠어요. 저 조막만한 몸으로, 제 몸의 두배나 되는 토드 군을......대단하죠."
상처를 다시 봐야겠다며 방을 나간 간호원의 발소리가 멎도록 제이슨은 넘어진 자세 그대로 눈만 깜빡였다. 어림잡아 150정도의 키에 체중이 40도 될까말까싶을 정도로 여린 아이었다. 안아들거나, 업어들 수는 없었을 테고. 끌고왔다해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깊이 베인 상처를 확인하고 정신을 잃었는데, 숲 속에서부터 병원까지 그 먼 거리를 소녀 혼자서 제이슨을 데려왔다면, 과다출혈로 이미 목숨을 잃었을게 어림짐작으로도 계산될 시간이었다.
- 열다섯이 죽어나갔는데, 그 애 딱 한 명만......
제이슨은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숨을 들이마쉴 때마다 복부가 땡겨 상처가 욱신거리는 탓에 최대한 숨을 참으며, 소녀가 달아난 방향으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마을의 지형은 지도가 닳도록 본 탓에 길을 잃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4년간이나 땅 위에서 자고, 땅 위에서 먹고, 땅 위로 달렸던 자신의 감을 믿고, 그는 소녀가 달아났을거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쉼없이 뛰었다. 곧 먼발치에 숲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하얀 나무줄기가 불규칙하게 늘어선 숲의 입구 앞에서 제이슨은 더 이상 뛰지 못했다.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 돌아가! 들어가지마! 고개를 털고 배를 움켜쥔 채로 숲으로 들어서려는 그의 옷깃을 누군가 잡아당긴다. 뒤를 내려다본 제이슨은 헉,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소녀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잘게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며 두어발짝 정도 물러난 소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처음 본 순간보다는 창백하단 느낌이 덜했다. 제이슨은 제 귀를 가리킨 뒤, 두 팔로 엑스자를 만들어보였고, 소녀는 입을 다물고 주변을 불안하게 둘러보았다. 말을 못하는건가. 배우지 못했나? 몸을 털고 일어서는 제이슨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녀가 다시 입을 연다.
"들어가지 말아요."
"...!"
"위험한 곳이에요."
"...이 숲속에서 날 데리고 나온 사람이 네가 맞아?"
"......"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난......나는 네가 쉽게 옮길 수 있을만큼 가볍지 않아."
"난 할 수 있어요."
"......"
"이 곳을 떠나요. 당신들 모두."
"왜? 대체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내게 말해줄래? 내가 부대에 보고하면,"
"우리는 떠나지 않아."
"......"
"우린 떠날 수 없어."
소녀의 눈빛이 슬픔으로 젖어든다. 달싹이는 마른 입술이 울음을 참는듯 앙다물리기에 제이슨은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찾았다. 깔끔한 면포일 뿐이지만, 그에게는 순식간에 눈 앞으로 고향을 그려내주는 소중한 것이었다. 고향을 떠나던 길에 그의 어머니가 그의 손에 쥐여준 손수건이기 때문에.
젖은 눈이 경계하듯 번뜩거리다 곧 눈물을 툭, 떨군다. 제이슨은 손수건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고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그렇게 울어도 지워지지 않아."
"......"
"네가 지우고싶은 기억은 눈물로 지울 수 없을거야."
"......"
"내가 도와줄게."
"당신은 우릴 도울 수 없어요."
"도와줄 수 있어. 네가 협조해준다면, 더 이상은 이런 기괴한 곳에서 불안에 떨며 살지 않게 내가 도와줄게."
"......"
"넌 누구지? 무슨 일이 있었어? 왜 다들 숨어사는거야?"
제이슨의 물음에 소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해진다. 잠시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있던 소녀가 어느 순간 먼 곳에 서 있다. 제이슨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낀 순간, 소녀의 숨결이 뒷목에 닿는다.
"이 곳을 떠나요."
풀썩. 힘없이 쓰러지는 제이슨을 가만 내려다보던 소녀의 빠른 움직임에 주변 들풀이 흩날린다. 손수건을 주워 제이슨의 주머니에 챙겨넣은 소녀가 가볍게 그를 들쳐매고 걸음을 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숲의 입구에서 멀어진 두 사람의 잔향이 여즉 그곳에 가득하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있던 베이지색 군복 차림의 남자가 손을 떨며 공터로 나온다. 남자의 바지춤이 젖어 지린내가 사방에 풍긴다. 얼마 못 가 무릎을 꺾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남자는 제가 본 것을 잊기 위해 비명을 지르고, 숨을 참아도 보고, 눈을 찌르기도 했다. 말이 안될 정도로 빠르고 힘이 센 작은 소녀와 그녀를 노려보던 수많은 눈빛들. 숲 속 구석구석에 자리하고있던 붉은 눈빛이 이제는 그를 향한다.
"살ㄹ...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바들바들 떠는 모양새에 눈 몇 쌍이 깜빡인다. 희미한 햇빛에 나뭇잎이 반짝이는가 싶었는데, 손 끝이 날카로운 사내아이 하나가 남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눈빛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서글픈데, 날카로운 손 끝은 가차없이 남자의 목숨을 끊어낸다.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다시 숲으로 숨어드는 사내아이의 입에서 살려달란 말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을 들으며 남자는 눈을 감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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